08_할매 무녀
사냥을 나갔던 사내들이 놀랍게도 단 한 명의 희생 없이 마을로 돌아왔다. 하지만 잔치를 벌여도 모자랄 기쁨 대신, 마을 전체는 알 수 없는 묘한 침묵 속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이상한 소문이 우물가에 모인 아낙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들었어? 할매 무녀가 보리에게 돌탑을 쌓으라고 시켰다는 거야. 보리 아빠가 그래서 살아났다니까. 호랑이가 이미 입에 문 사람을 어찌 그냥 놓아주겠어? 할매 무녀의 신통력이 아직 살아있었다니까!”
사냥 중, 호랑이가 풀숲에서 불쑥 튀어나와 보리 아빠의 머리를 물었다고 했다. 그런데 호랑이가 날카로운 창에 찔린 듯 아파하더니 그냥 물러났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아니면 신의 은덕인지, 호랑이에게 물렸음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보리 아빠의 이마에는 생사의 경계를 증명하듯, 호랑이 이빨 자국 두 개만이 뿔 같은 문신처럼 선명하게 남았다.
“할매요! 할매요! 아빠가 돌아왔어요!”
보리는 환한 얼굴로 굿 방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미 이승을 떠나 고요히 누워 있는 할매 무녀의 육신만이 있을 뿐이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달콤하고 짙은 복숭아꽃 향기가 밖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밝히는 신의 세계로 떠난 무녀의 냄새였다.
“아빠를 살려준 할매 무녀가 돌아가셨어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을을 지켜주던 할매 무녀가…!”
보리는 마을 곳곳을 뛰어다니며 사람들에게 이 비보를 전했다. 마치 반드시 해야 하는 사명처럼. 보리가 골목을 지날 때마다 복숭아 향이 바람에 흩날리듯 집집이 퍼져나갔다.
“에구, 에구! 할매 무녀님이 돌아가셨구나!”
마을에서 곡을 잘하는 깨골 엄마가 마당에 엎드려 소리 높여 곡(哭)을 시작했다. 그러자, 서로 질세라 앞다퉈 곡하니 장례 분위기가 숙연하게 무르익기 시작했다.
“어머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리 아빠는 자신을 살려준 은덕에 보답하고자 상주를 자처했다. 넉넉하게 돼지고기를 잡아 손님들에게 대접했고, 술이 떨어지지 않게 온 마을의 술을 전부 가지고 오게 했다.
“어릴 적 죽을 뻔했는데, 할매 무녀가 살려줬잖아.”
마을 사내들은 굿 방 마당에 모여 밤새 할매 무녀의 은혜를 이야기했다. 누구 먼저랄 것도 없이 할매 무녀에게 은덕을 입은 이들의 입에서 절로 그 경험을 자랑스러워하는 듯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너뿐이겠나. 나도 그랬지만, 우리 집 아이도 마찬가지였지.”
“할매 무녀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 중 몇이나 이 자리에 살아 있겠어.”
모두가 할매 무녀를 외롭지 않게 보내려, 날이 새도록 자리를 지키는 걸 당연한 도리이자 명예로 여겼다.
장례를 치르는 그날 밤, 보리는 할매 무녀를 위해 돌탑 위에 돌을 올리고 기도했다. 보리의 사연이 전해진 후로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씩 당산나무 아래 돌탑에 돌을 올리며 기도했다. 그 결과였을까. 호랑이가 마을에 내려오는 일이 거짓말처럼 없어졌다. 사람들은 ‘돌탑이 마을을 지켜준 수호신의 길’이라 굳게 믿었다. 보름 만에 당산나무 주변에는 정성스럽게 쌓인 돌탑이 벌써 열 개를 훌쩍 넘게 줄지어 서 있었다.
09_도깨비불
돌탑 덕분이었는지 마을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잎이 하나둘 떨어지던 어느 아침, 이상한 소문이 마을 전체에 퍼졌다.
“에구머니나, 도깨비불이야!”
새벽녘에 오줌을 누러 나왔던 달래 아빠가, 호박만 한 푸른 불덩이가 덩실거리며 날아오르는 걸 보고는, 바지도 추스르지 못한 채 방으로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 들었어? 달래 아빠가 도깨비불을 봤대! 산 너머에서 파란불이 춤을 추듯 떠올라서는 돌탑 위로 쏜살같이 날아갔다는 거야!”
우물가에 모인 여자들 사이에서 통이 엄마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수다를 늘어놨다.
“어머, 그거 도깨비불이 아니라 혼불 아냐? 혹시 누가 밤새 죽은 모양인데. 누구 죽었다는 말 듣지 못했어?”
갑이 엄마가 목소리를 높였다. 목이 길고 턱이 뾰족해서 그런지 남들보다 목소리가 두 배 더 올라가곤 했다. 마을의 수다와 노래를 도맡아 하는 목청 좋은 여자였다.
“파란불이라면 혼불일 가능성이 크지… 혹시 지붕 위로 날아가는 건 못 봤어?”
평소 아는 척하길 좋아하는 길래 엄마는 뭔가 짐작 가는 듯 짐짓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밤늦게 마당에 묶여 있던 개가 짖다 말더라고. 도깨비불도 혼불도 아니라면, 혹시 호랑이가 내려온 거 아니야?”
통이 엄마는 겁도 없는지, 오히려 신난 얼굴로 호랑이를 입에 올렸다.
“어머나 세상에, 또 내려온 거야? 한동안 잠잠했는데, 진짜 호랑이가 온 거면 어쩌지? 아유, 무서워라!”
두 번이나 개를 호랑이한테 잃었던 순덕 엄마는 얼굴이 새파래져 황급히 자리를 떴다.
이날 마을은 도깨비불 소문으로 하루 종일 술렁였다. 평소엔 찾아뵙지도 않던 자식들이 부모의 안부를 확인하러 허둥지둥 달려왔다. 다행히도 밤새 죽은 이는 없었다.
“사냥 나간 지아비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세요…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순덕 엄마는 꼭두새벽부터 돌탑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사냥을 나간 남편이 열흘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엄마를 지키겠다며 따라나선 순덕이는 무거운 쇠스랑을 겨우 붙잡은 채, 벌써 몸을 떨어 댔다. 발밑에 꼭 붙어 있던 강아지는 똥구멍 뒤로 꼬리를 감춘 채,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추위보다 공포로 인한 긴장이 더 사나운 밤이었다.
“끼잉… 낑, 낑…”
개의 낑낑거리는 울음에 모녀가 깜짝 놀라 서로 부둥켜안았다.
“엄마… 엄마. 저기… 도깨비불이… 이리로 와요…”
순덕이는 눈을 질끈 감은 엄마 팔을 잡아당기며 소곤거렸다. 모녀는 소문으로만 듣던 도깨비불이 진짜 나타났다는 공포에 기도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10_도깨비
어둠이 차갑게 내려앉은 밤.
“아니, 여긴 어디야…? 도대체 왜 자꾸 엉뚱한 데로 튕겨 나오는 거냐고!”
푸른 도깨비불을 동반하고 나타난 괴상하게 생긴 도깨비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요즘 들어 ‘자리’를 옮길 때마다 엉뚱한 곳으로 튀어나오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다. 짜증을 주체하지 못한 그는 한 줄로 쌓아 올려진 돌탑 하나를 장난스레 발로 툭 걷어찼다.
댕그르르—
돌탑 아래 놓아둔 사발이 흔들리면서 달짝지근하고 걸쭉한 냄새가 훅 코로 흘러들었다.
“킁… 킁킁…”
그는 땅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이야~ 이 냄샌 진한 술 냄새잖아!”
시큼하고 걸쭉한 냄새의 오래 삭힌 막걸리였다. 코끝에 묻은 술을 쩝쩝 맛을 보더니 단숨에 사발을 비워냈다.
“캬아! 기똥차구나!! 이거야! 이게 술이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막걸리는 밍밍하다며, 싫어하던 도깨비였다. 이렇게 밖에서 삭혀 걸쭉하고 시큼한 술이 그의 입맛에 딱 맞는 모양이었다.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치마를 걸친 도깨비가 허물어진 돌탑에 털썩 앉았다.
홀짝! 홀짝!
“정말… 달콤한… 술이다…”
그는 텅 빈 사발을 입에 대고 연신 마시는 시늉을 했다. 마치 정말 술이 무한히 있기라도 한 듯.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오늘도 좋고, 내일도 좋고.”
“좋아, 좋아! 도깨비가 기분이 좋아!”
“모레도 좋고, 글피도 좋고.”
“아주 그냥 계속계속 좋아!”
금방 술에 취해 흥이 났는지 한참이나 춤을 추듯 노래를 불러 젖혔다.
“뭐 하고 놀까? 오늘은 뭐가 재미있을까…?”
얼큰하게 취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놀거리를 찾았다. 이내 허물어진 돌탑의 돌 다섯 개를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고 공중에 높이 던졌다. 도깨비가 아이처럼 공기놀이를 시작했다.
“구미호 두 마리, 호랑이 세 마리를 잡았다!”
두 개, 세 개의 돌을 달이 가려질 정도로 높이 던졌다. 어른이 두 손으로 던지기에도 벅찬 돌을 조그만 공깃돌처럼 손등에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있었다.
“구미호 세 마리, 호랑이 두…”
그 순간, 산 쪽의 어둠 속에서 마을로 내려오던 젊은 수컷 호랑이 영물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씩 웃으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진짜로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았…”
도깨비가 천천히 노래를 부르며 치마를 걷고 달려들려는 찰나, 호랑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뒤로 툭툭 물러났다. 극도로 겁먹은 눈빛이었다.
“살금살금 걸어오는 호랑이도 기분이 좋아~ 호랑이야~ 호랑이야~ 어서 와서 나랑 밤새워 놀자꾸나~.”
그는 호랑이가 도망칠까, 약 올리듯 살살 달래보려고 했다. 하지만 젊은 수컷 호랑이는 상대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채고는 부리나케 산속으로 도망쳤다.
“쳇! 잡을 뻔했는데, 한 마리 놓쳤네. 저놈은 쓸모없는 겁쟁이구먼.”
놀잇거리를 놓친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랑이가 재미없긴… 하하하. 그래도 좋다. 좋아!”
헛웃음을 키더니,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비록 사냥에는 실패했지만, 어지럽게 흩어진 돌탑 주변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날 밤을 그렇게,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날이 밝아올 때까지 혼자 노는 도깨비였다.
“하암… 여우를 모두 잡았다. 하암… 호랑이를 모두 잡았… 아차, 한 마리를 놓쳤지. 그래도 꽤 잘 놀았네… 이제 잠이나 자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