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관
정확히는 ‘다시’ 시작이다. 참선 수업을 듣다 고질적인 허리 디스크가 터졌고, 그 여파로 목까지 나빠졌다. 그렇게 수업을 중단한 채 6개월 넘게 재활 치료에 매달렸다. 통증이 조금 잦아들 무렵 마침 들려온 개강 소식에 망설임 없이 등록했다.
하지만 허리 환자에게 오래 앉아 있는 일은 그 자체로 거대한 장벽이다. 허리 끝에서 통증이 타고 올라오면, 간신히 붙잡고 있던 집중력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참선을 계속해도 되는 걸까?’부터 시작해 온갖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다음 진료 때 선생님께 여쭤볼까? 분명 혼내실 텐데….’, ‘허리 받침이 있는 의자에 앉아야 하나?’ 번뇌는 멈추지 않고, 호흡을 바라보겠다던 다짐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첫술에 배부를까. 오늘은 그저 수업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와 버스를 타러 걷는 길.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순간적인 몰입과 찰나의 명상을 이어가려 애써본다.
자비관(慈悲觀).
자비의 ‘자(慈)’는 고대 인도어인 팔리어로 ‘메타(Metta)’라 하며, 영어로는 ‘loving-kindness’라고 부른다.
만약 내가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거나 상처를 주었다면
내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누군가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거나 상처를 주었다면
그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용서합니다.
내가 안락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안락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기원하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이 안락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악의와 분노와 성냄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악의와 분노와 성냄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이 악의와 분노와 성냄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이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편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하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닦은 보시, 지계, 수행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과 이 공덕을 나누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기원합니다.
기도문을 따라 타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또 타인을 용서하며 모두의 행복을 빌어주는 순간, 신기하게도 숨이 한결 편안해졌다. 몸을 짓누르던 긴장이 조금씩 완화되는 기분이다. 단순히 기분 탓이었을까. 내가 그렇듯 누군가 나를 위해 이런 기도를 해준다면 참 고맙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나를 미워하거나 불편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기도를 하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길임을 문득 깨닫는다.
몸의 건강을 위해 올바른 습관을 기르듯, 마음도 매일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비관은 내 마음을 유연하게 풀어주는 ‘부드러운 스트레칭’쯤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