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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띠또 Dec 26. 2023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법

나? 엄마?

아주 오랜만에 번역원 식구들을 만났다. 마지막 모임이 지난여름이었으니 무려 일 년 반만의 만남이다. 할 얘기가 흐르고 넘쳐 점심에 만나 해가 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도 부족했던 만남. 개성이 제각각인 우리가 단 하나지만 강력한 공통점-프랑스어-를 중심으로 모여 인연을 만들어간지 벌써 몇 해가 흘렀다. 갓 결혼한 새댁 친구는 어느새 예쁜 아가를 낳았고, 또 다른 친구도 결혼해 저 멀리 타국에서 살고 있다. 그토록 취업에 진심이었던 나도 어느새 입사 일 년이 지났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친구, 꾸준히 글을 연재하는 친구, 종강 후 번역원 선생님께서 소개해준 출판사와 정말로 연이 이어져 번역을 하고 있는 친구까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잘 살아가는 근황을 나눈 기쁘고 충만한 시간이었다.


하는 일도 살아가는 공간도 모두 다른 우리의 이야기 그 자체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된 시간이기도 하다. 그동안 학교라는 공간, 비슷한 나이대의 친구들만 만나오다가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인생 경험 이야기를 들으니 나의 고민들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었고, 줏대없이 흔들리던 마음이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아이를 낳을 생각이 있는 여자라면 누구나 할 바로 그 고민. 나의 일과 육아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에 대해 말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는 너무도 명쾌하고 현명한 답을 내릴 수 있었겠지만 나는 두 마리 토끼 사이에서 갈팡질팡했기 때문에.. 나와 같은 다른 누군가에게 실마리를 남기기 위해 글로 적어보고 싶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그것도 직무를 바꿔 신입사원으로 취업한 나에게 육아휴직은 꿈을 꾸지도 못할 단어였다. 사회적 나이를 생각하면 한창 일을 배우고 자리를 잡아야 할 때인데, 생물학적 나이는 이런 사정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이상적인' 나이가 이렇게 지나가 버려서 나에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무서웠다. 그와 동시에 회사에서 일어나는 각종 갈등과 불합리함을 겪으며 이렇게까지 일에 중요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했다.


통번역 대학원을 졸업해 프리랜서 통역사로 활발하게 활동하다 kbs 월드 라디오에서 십여 년을 열일하고 지금은 예쁜 두 아이를 기르고 있는 언니는 나의 이런 고민에 명쾌하게 답을 내려 주었다. 나의 오류는 일과 아이 둘 중 하나만 선택하려는 것에 있었다. 물론 둘을 병행하기에는 물리적으로 무리가 있다. 그렇기에 현명해야 한다는 것을 이번에 배웠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기쁨과 보람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이도 중요하고, 나의 일도 중요하다. 아이가 자랄 때 엄마도 함께 자라야 한다." 언니의 지인 역시 통번역 대학원을 졸업해 커리어를 쌓아갔지만 육아를 위해 본업을 중단했었다고 한다. 아이에게 간식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시작한 베이커리에 푹 빠져서 지금은 베이커리 카페를 차려 벌써 몇 년째 성황리에 운영 중이라고 한다. "하나에만 집착할 것 없다. 인생을 살다 보면 계속해서 길이 생기고, 문이 열린다. 그러나 새로운 길을 걷기 위해서는 지금 하는 이 것에 최선을 다해 어떤 미련도 남겨서는 안 된다."


이런 방법도 있구나. 머릿속에 전구가 켜지는 기분이었다. 난 회사일이 아닌 "내 일"이 너무 하고 싶은데 이제서야 첫 스텝을 밟고 있고, 아직 갈 길이 멀기에 정말이지 고민이 컸다. 모든 걸 다 포기할 만큼 아기가 가치 있나? 그렇게 좋은 건가? 해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라서 어떤 결정도 결심도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서 일과 육아의 양립은 아주 힘든 일이다. 내 또래의 친구들은 아이를 낳고 전업 주부로 전향한 케이스가 많고, 이런저런 글을 읽어보면 육아를 하며 경력이 단절되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같은 팀 선배도 잦는 출장과 야근으로 인해 평일에는 아이의 자는 모습만 본다는 얘기를 할 정도니, 육아휴직 후 복직해서 이전처럼 일을 하느라 아이가 거의 남과 또는 혼자 지낸다는 이야기도 너무나 흔한 일이다. 자연히 나는 육아는 곧 커리어의 중단 내지는 회사와 아이의 눈치를 보며 둘 다 만족시키지 못한 채로 고생을 해야 할 삶으로 여겨왔다. 육아와 일 모두 한 개인이 가진 에너지를 몽땅 다 써야 할 정도로 중요한데 그 무게를 개인이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 그러니 힘들이지 않고 둘 다 잘 해내는 사람을 주위에서 본 적이 없다. 중요한 일이니 힘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서글프고 겁이 났다. 크게 후회할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지금 하는 일이 재미있고 보람과 성취감도 크다 - 조직의 부조리함은 제외-. 그래서 쭉 이어서 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공부했던 것들을 못 쓰는 것도 싫다. 그러나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이 업무의 특성상 아이를 기르면서 병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나의 보람과 성취감만을 위해서 아이를 혼자 두면서까지 할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게 까지 할 만큼 연봉과 복지가 좋은 곳도 아니고, 육아휴직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공공연하게 표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더더욱 고민이 되었다. 이직이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2년 경력을 만든 후 이직을 해서 또 자리를 잡으려면 2년, 3년...? 대체 언제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그렇게 해서 또 다른  곳에서 회사 생활을 한다고 해도 정해진 업무 시간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물리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답답하기만 했다. 이런 찰나에 내가 좋아하는 다른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다른 희망이 되었다. 꼭 불어가 아니더라도 괜찮을 수 있다.


물론 지금 당장 눈앞의 일도 아니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얼추 들은 것이지만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나에겐 큰 깨달음이다. 일단은 너무 멀리 보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이 일이 재밌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달라질 수 있는데 너무 극단적이었다. 당장 내일도 어찌 될 줄 모르는데 먼 일까지 생각하려니 이도저도 못했다. 지금 이 일은 지금의 나만을 위한 것. 단순하고 확실한 사실 : 이곳은 내가 유학 - 대학원을 거치며 배운 모든 것들을 이곳저곳에 써먹을 수 있는 확실한 환경이다. 원 없이 한없이 미련 없이 일하면서 새로운 분야를 배울 수 있을 만큼 배울 수 있다. 미련이 없을 때까지 열심히 일하고, 그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은 후에 아기를 기르면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경험을 할 것이다. 그러면서 엄마이자 나로서 또 설 수 있도록 눈과 귀를 열고 조금씩 탐색하고 배우기. 지금 하는 일과 이어질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모든 문을 열어두기.  막상 육아를 하게 되면 그 하나만으로도 벅차, 또는 그 하나만으로도 충만해 다른 무언가를 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집중해야 할 것을 알았고, 지금이 꼭 미래의 일과 이어져야만 하진 않는다는 것, 그렇기에 이 시간들은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다. 그러니 지금에 온전히 집중하자.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명백하겠지만 나는 이 생각을  이번 만남 전에는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걸어가야 하는데  나와 비슷한 길을 먼저 걸었던, 결이 비슷한 선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행운이다. 이런 귀한 경험담을 가감 없이 나누어준 귀한 인연에게 감사한다. 누군가의 고민이 조금이나마 덜어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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