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바위처럼 수천년 가슴에 간직하는 그리움이 사랑이련가

늦가을 설악산 화암사 풍경 스케치

by 프리맨

후배랑 속초로 설악산 단풍을 구경하러 이박삼일 놀러 갔다. 막상 설악산에 오니 산 위는 단풍이 졌고, 아랫 자락에만 단풍이 남아 있었다. 후배와 나는 즉흥적으로 다니는 편이라, 설악산 유명한 코스는 안중에도 없고, 전국의 절을 찾아다니는 후배의 제안에 따라 설악산 자락에 있는 화암사(화엄사가 아니고 화암사)로 가서 단풍 구경을 하기로 하였다.


차에서 내려 진입로로 들어서자 색색의 단풍이 눈부실 정도로 반짝이고, 미풍에 나뭇잎끼리 서걱거리는 소리가 뇌파를 황홀하게 간지럽혔다. 한껏 달아오른 기분에 길 양옆으로 세워진 고승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을 읽자니 가슴이 시렸다. 고승들이 평생 살며 깨달은 한마디, 열반을 앞두고 유언처럼 남겨놓은 문장들. 이 한마디에 고승의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나는 어떤 한 문장이라도 깨달음이 있었는지, 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지 자문해 보게 된다.



KakaoTalk_20251105_225456411.jpg
KakaoTalk_20251105_225456411_03.jpg
KakaoTalk_20251105_225456411_02.jpg
KakaoTalk_20251105_225456411_01.jpg


아름다운 풍경과 좋은 글귀를 보니 문득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스쳐갔다. 왜 이런 때면 혼자 맛있는 것을 먹다 들킨 사람처럼 미안한 마음이 올라오는지. 소중한 사람이라고 하여 늘 좋게 지내고, 충분히 정을 나누고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아쉬울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을이 깊어가며 마음속 묵직함이 더해가는데, 자연이 베풀어준 선물 같은 풍경 앞에 그만 솟구치는 감정을 추스리기 어렵다. 이렇게 미안해하고 아쉬워하다 끝나는 게 인생인 거 같다. 겨우 마음을 달래고, 질척한 감정을 끊어내려 사찰 안 뜰로 황급히 들어가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진입로를 들어오며 나무 사이로 일부만 보였던 수바위는, 경내에서 바라보니 소설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바위처럼 대단한 위용을 내뿜었다. 수바위는 이 절의 수호신처럼 우뚝 서 있고, 말 못 할 그리움을 품고 수천 년을 살아온 것처럼 보였다. 잠시 살다가는 중생들을 바라보며 수바위는 그리움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앉아있으리라. 마침 수바위가 잘 보이는 찻집이 보여, 창가에 자리 잡고 하염없이 수바위를 바라보았다. 수바위는 나에게 말을 건네는 듯했다.


수천 년의 그리움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그리움이 쌓이다 보면 저절로 사랑으로 풀려나가는 법이지. 은은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야말로 진짜 진한 국물이지.


수바위는 분명 나에게 말을 걸며 미소 짓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일을 다 아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수바위의 따뜻함을 더 가까이 느끼고자, 수바위쪽 등산로로 올랐다. 아쉽게도 수바위 앞에 금지선이 있어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내친김에 신선대까지 올라가기로 하였다. 수십 분을 오르니 신선이 놀았다는 신선대가 나왔다. 나는 벌러덩 바위에 누워 하늘을 응시했다. 흰 뭉게구름이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두둥실 떠 있다. 이어폰에서는 윤학준 곡 '마중'노래가 무한 반복으로 돌아갔다. 먼저 달려가지 못하고 그저 그립기만 하다.


<마중>

사랑이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

말 한마디 그리운 저녁

얼굴 마주하고 앉아

그대 꿈 가만가만 들어주고

내 사랑 들려주며

그립다는 것은 오래전

잃어버린 향기가 아닐까

사는 게 무언지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


*하무뭇하니는 순우리말로 매우 흡족하다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