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갑이 아니라 세입자가 갑이었어?
이미 세입자는 정해져 있었고,
이제 그 집을 사줄 사람만 남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경민이었다.
경민은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원하는 지역, 딱 맞는 가격, 세입자까지 세팅 완료.”
누가 봐도 초보 투자자에게 기막힌 기회였다.
이쯤 되면 하늘이 나를 돕는 거 아닌가?
경민은 내심 뿌듯했다.
“그래, 갭투자도 운이야. 이번엔 내 차례인 거지.”
며칠 뒤, 전세계약을 체결하는 날.
계약서에 적힌 세입자의 주민등록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87년생.’
또 87년생.
매도자도 87, 자신도 87, 세입자도 87.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갑인데…
누군가는 차익을 남기고,
누군가는 그걸 인수하고,
누군가는 남의 집에 들어오네…’
경민은 뭔가 묘한 씁쓸함에 입꼬리를 씰룩였다.
말도 안 되는 우연 같지만, 그 안에 인생의 구획선이 보이는 듯한 기분.
그 순간만큼은 세입자가 조금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전세계약은 부드럽게 마무리됐다.
세입자도, 중개인도, 경민도 모두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며칠 뒤 걸려온 전화 한 통이,
그 평온함을 아주 빠르게 깨뜨렸다.
“입주 전에 청소를 하려고 하는데요,
입주청소비 정도는 지원해주시면 안 될까요?”
경민은 당황했다.
“네…?”
입주청소비? 집주인이?
경민은 즉시 부동산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장님, 요즘 세입자들이 입주청소비도 요구하나요?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전화기 너머 소장님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요즘 세입자들이 많이들 그래요.
그리고 세입자가 갑인 세상이잖아요.
나중에 집 보여주고 할 때도 협조해줘야 하니까,
10만원 때문에 감정 상하느니 그냥 지원해주는 게 나아요.”
소장님의 말에 경민은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갑이라고? 내가 갑 아니었어?’
그 말에 속이 뒤집혔지만,
그런 티는 내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강변을 찾았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강물,
바람결에 나뭇잎이 스윽 미끄러져간다.
경민의 생각도 그 잎처럼 강물 위를 떠다녔다.
그때 문득, 계약 날 세입자와 함께 왔던 아이가 떠올랐다.
작은 손, 아직 단어가 서툰 말투.
‘그래… 그 아이도 곧 이 집에서 자라겠지.’
경민은 마음을 조금 내려놓기로 했다.
‘그래, 10만 원 다 줄 필요는 없고…
사다 놓은 휴지랑 포장을 뜯지 않은 장난감들이나 주자.
그리고 현금은 5만 원만 드리면 되겠지.
버릴 것 줄이고, 애도 챙기고, 미니멀라이프도 실천하고…
이 정도면 괜찮은 판단 아냐?’
경민은 스스로의 결정을 꽤 그럴싸하게 여기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그는 생애 첫 갭투자 이후,
생애 첫 ‘집주인 수업’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