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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건네고 싶을 때가 있다

경청과 비교 사이에서 발견한, 우리의 인간적인 면

by 해피엔딩

최근 어느 강연을 들었다. 강연자는 “자기 안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다면 좋다”고 말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어와 오래 맴돌았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동시에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떠올랐다.
그들은 “자기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좋은 이야기를 하면 시기와 질투를 부르고,
슬픈 이야기를 하면 약점으로 이용당하기 쉽다고.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늘 머뭇거린다.
말을 할까, 말까.
건네고 싶다가도 삼키고, 삼키다가도 어느 날 불쑥 입술 끝까지 차오르는 어떤 마음.


10대 때는 말할 수 있는 어른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고민을 털어놓을 어른들이 있었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어쩌면 제대로 들어주지 못했을지라도,
그저 말할 ‘자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큰 위로였다.

하지만 스무 살이 지나 사회에 발을 들이자, 그 자리는 사라졌다.
그때부터 사람은 스스로 관계를 개척해야 한다.
술 한 잔 앞에 두고 용기 내어 마음을 여는 것도,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조심스레 가늠하는 것도
모두 그때 비로소 시작된다.


그리고 서른 즈음,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생기고 나면

다시 말의 무게가 달라진다.
아이가 자라고, 부부가 서로에게 기댈수록
“아무 말이나 할 수 없다”는 걸 어른들은 자연스레 배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나는 정말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일까?
아니면 ‘잘 들어주는 척하는 사람’일까?

그 질문이 나를 멈춰 세운다.


남편은 말했다.

TV에서 자녀가 20살이 되기 전 독립했다는 이야기를 전했을 때,
남편은 순간적으로 안도했다고 한다.

“그래, 아이를 낳지 않기를 잘했어.
나에게 더 맞는 삶을 선택했구나.”

그 감정을 스스로 바라보며 남편은 말했다.

“나는 진짜 경청을 한 걸까?
아니면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 비교하고 판단한 걸까?”

그 고백은 나에게 낯설지 않았다.
남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감정이라 생각했다.
부러움, 비교, 안도—
그 모든 진실한 마음을 인정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남편의 말을 들으며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남편이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경청을 잘한다고 믿어온 사람의 마음속에도 작은 질투와 비교가 있었음을,
그가 스스로 인정했다는 사실은 오히려 더 깊은 신뢰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 역시 깨달았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부럽다’고 느끼는 마음,
누군가의 고민을 듣고 ‘나는 다행이다’라고 안도하는 마음.
이런 감정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래, 나도 완벽하지 않지.”

이 문장을 편안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어른이 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안전한 사람’ 딱 한 명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이해해줄 필요는 없다.
모든 말이 100% 공감받을 필요도 없다.

그저 열 번 중 한 번,
내가 건넨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관계는 이미 충분히 깊다.

그래서 사람은 말을 한다.
상대가 완벽한 청자가 아니더라도,
가끔은 온 마음으로 들어주는 순간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남편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
그렇지만 나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10번 중 한 번은 진심으로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
그 순간이 아름다워서,
그래서 사람은 계속해서 서로에게 말을 거는 건 아닐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건네고, 듣고, 때로는 서툴게 공감하고,
상대의 인간적인 면을 발견하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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