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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수희 Nov 06. 2024

달이 좋은 아내 태양이 좋은 남편

어두운 방 즐거운 마음

당신에게 부부란 가족이란 어떻게 정의 내려지는가? 애정이 묻어 나는 구성원들의 웃음과 사랑이 넘치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관계라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정의이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모습은 나에게 불가능이다. 애초의 나의 부모님은 흔히 말하는 부부의 지침서 같은 신뢰와 애정이 바탕에 없었다. 그리고 무책임하게 자식을 두 명이나 낳았다. 엄마의 양 발 중 한쪽 발은 사랑을 찾은 상대에게 그리고 나머지 한쪽 발은 아빠의 달콤한 금전적 유익함을 즐기기 위해 자식을 위하는 척 우리 곁에 남았다. 그렇게 넓게 벌어진 발은 나와 나의 동생의 삶에서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그런데 새롭게 구성한 나의 가정 역시 사랑이 넘치는 집은 아니었다. 그와 나는 아주 많이 다르다. 



그에게 즐거움은 자극이다.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바다 수영을 하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걸 좋아한다. 재밌고 신나는 모든 일은 집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짜릿함과 설렘이 원동력이 되는 사람이다. 무엇이든 빠른 움직임과 동적임을 좋아한다. 반응이나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절부절 하곤 한다. 더 나아가 그는 언제나 불안에 떠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굉장히 가부장적이며, 억압적이다. 그가 내린 판단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그것을 증명하려 자꾸만 캐묻거나 확인하고 그것이 증명되면 그 안에  다른 사람을 끼우려고 한다. 타인을 맞춘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 그렇게 쉽지 않으니 화 또한 많다. 도로에서도 조금만 다른 운전자의 운전이 서툴거나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오면 순간적인 욕설을 퍼붓는 사람이다. 뭐 물론 아이를 아주 많이 사랑하기에 자제를 하려고 하지만, 순간순간 자신에게 다가오는 장애물을 부드럽게 피해 가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반면, 나에게 즐거움은 고요함이다. 해가 지는 노을을 보면서 조용한 음악을 듣고 은은하고 어두운 조명 아래 와인 마시는 걸 좋아한다.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일들은 집안에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고요함과 지적임이 원동력이 되는 사람이며 정적임을 좋아한다. 즉각적으로 효과가 있지 않더라도 막연한 변화를 기대하는 낙관론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개방적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그를 닮아가고 있다. 운전대 앞에서 난폭해지고 그를 보면 욕을 한다. 반대인 그 사람을 보면서 화가 난다. 서로에게 생겨나는 불화와 갈등으로 파생된 우리 사이는 치사해지게 된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치사한 사이가 되어간다. 무엇이든 다 주고 싶은 마음이 아닌 주면 받아야 하는 사이가 되었다. 반대로 받았으니 주어야 하는 마음은 없다. 순도 100%의 희생은 없지만, 치사함 속 생존을 터득하고 있는 중이다. 연애 시절 첫눈에 반해 나의 모든 게 활짝 열린 내 마음의 방에는 강렬한 태양만이 있었다. 태양 아래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오직 빛과 화려함만이 있었다. 그렇게 활짝 열린 방에는 나의 마음과 그의 마음을 고요히 바라볼 수 있는 멈춰짐 속 세심함이 없었다. 그러한 곳에는 아늑함과 고요함이 없었다. 그 열린 방이 서서히 닫히자 비로소 서서히 하나씩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짙은 어둠 속에 가만히 멈춰 있으면 그제야 서서히 형태를 드러내는 사물처럼 점점 닫힌 어두운 마음의 방 안에는 조금씩 그와 나의 문제와 존재가 스물스물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렇게 닫힌 방안의 어둠이 더욱 본질의 선명함으로 다가가게 해주는 것 아닐까? 오늘 밤은 어둡다. 나의 어두운 방에는 작고 은은한 노란빛을 힘껏 내려주는 크리스탈 스탠드가 있고, 빨갛고 달콤한 탱글탱글 방울토마토, (요즘은 토마토가 너무 비싸서 사치이다) 그리고 슬라이스 된 꾸덕한 치즈 한 장 있다. 달밤을 음미하며 그렇게 남편에게 닫힌 나의 마음속 생각들을 들여다보고 바라보고 생각하고 아껴줘야겠다. 아니 어쩌면 밝음보다 어둠을 좋아하는 나에게,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 나의 모든 걸 보여주고 공개하게 해주는 남자보다 이렇게 반쯤 닫히게 만들어 내 안의 어두움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지금의 이 남자가 더 나을 수도 있는 건가? 그렇게 해서라도 위안을 삼아야 오늘을 살아낼 수 있다는 처절한 버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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