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싫어요

그럼에도.

by 밍장

그럼에도 내가 길을 나선건 따사로운 햇살. 선선한 바람. 싱그러운 꽃들과 나무. 가벼운 아이들의 웃음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길을 나선 거다. 거닐어도 보고 수없이 지나가며 봐온 길이었지만 나는 먼 이방인처럼 그 길을 헤매었다. 그러다가 찰나의 기억으로 입꼬리를 늘렸다가 그것도 잠시, 기억은 추억으로 뒤바뀌어 내 목구멍을 옥죄어왔다.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봄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너와 나의 몸을 우리의 주변을 따사롭게 감싸오던 햇살이 이제는 잔인할리만큼 찬란하다. 그때보다 이쁜 것도 없고, 그때보다 따스한 것도 없다. 너와 함께였던 길 위에서 그리고 그 공간에서 이제는 너와 우리를 추억으로만 떠올려야 하는 매 순간순간들이 서럽기만 하다. 어디까지 언제까지 나는 이 길을 헤매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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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걷고 싶어서 양 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천연덕스럽게 집을 나섰다. 최근에 티브이에 흘러나와 들어보고 싶었던 노래를 들으며 그 길을 걸었다. 걷다가 걷다가 또 걷다가. 이제는 나만 없는 너의 존재에 덜컹 내 심장은 또다시 가라앉는다. 그렇게 앞서 걸어갔었는데. 그렇게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였는데. 그렇게 그곳에서 한참 냄새를 맡았었는데. 그렇게 가다가 가끔씩 뒤를 돌아봐줬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그 바보 같은 얼굴이 내 모든 걸 알아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틈에 내 전부가 그곳에 가득 담아져 있었다. 귓가를 통해 내 안에 울려 퍼지는 노래와 가사들은 너의 향기를 더욱 진하고 독하게 풍겨오게 했다. 나는 그 향기의 취해 울고 울며 길을 걸었다. 유독 길었던 그 길은 이제 짧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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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혹은 자주 너를 깊이 떠올리고 생각하다가 찰나의 신기루처럼 사라지면서 순식간에 다른 것에 사로잡혀 너를 잊어버린다. 그런 나 자신을 보며 징그럽고 웃기지도 않는다. 네가 보고 싶다며 끅끅대며 울다가 또 바보 같은 영상을 보며 바보같이 웃는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안고 싶어서 그게 미치게 그리워서 아마도 내 뇌가 살려고 바보 같은 영상을 찾아 웃게 만들려는 것 같다. 그래야 잊고 웃고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일종의 생존 본능 같은 거 말이다. 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맥락으로 합리화를 한다.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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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나 골목골목에 싱그럽게 물든 녹음을 보면 네가 떠올라. 날이 미치게 좋아서 팔레트로 그린 듯한 파란 하늘과 흰 구름점을 보면 네가 떠올라. 너랑 달렸던 그 순간이 떠오르고 너의 당찬 뒷모습이 떠올라. 나는 아직도 너의 자리를 미련하게 어루만지며 찾아다니고 있어. 준비된 이별 따위는 없어. 그냥 잠시 잊었다가 가끔 혹은 자주 짙게 너를 떠올리다 울고 힘없이 웃어보다가 새삼 텅 비워진 가슴의 통증이 느껴질 때면 잠깐 공허에 빠져들어가는 거야. 그렇게 다시 너의 빈자리를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지금과 여전히 싸우고 아주 아주 천천히 타협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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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혼자 있는 걸 좋아했다. 그래도 부르면 다가와서 날 안아주고는 했지. 주먹만 한 머리가 내 팔 안으로 파고드는데 어찌나 따뜻한지. 두툼한 엉덩이가 내 허리에 기대면 어찌나 든든한지. 작은 콧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콧바람이 어찌나 힘찬지. 나보다 몇 십배는 작은 너에게 안겨 너만의 냄새를 맡고 문대며 나는 숨을 쉬었다. 그땐 몰랐지. 지금 이 모든 것들이 하찮은 내 기억으로 밖에 떠올려야 될 것을. 너는 나에게 참 많은 걸 주고 갔다.


여기 내가 있는데 내가 없다.


네가 없으니, 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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