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배 밖으로 나온 씨를 다 어쩐담.

연필그림일기

by 장명흔


'배 밖으로 나온 씨를 다 어쩐담. 그렇다고 씨를 생략하면 딸기가 딸기답지 않을 거고.'


딸이 사 온 딸기를 앞에 두고 그려 보려 하니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난감해 혼자 중얼중얼하는데

작은 녀석이 옆에 와 도와준답시고 한 마디 거든다.

"무조건 똑같게 그리려 하지 말고 그냥 엄마식? 대로 한번 그려 보셔"

" 식?"

"그래. 그냥 생각대로 자유롭게." 참, 녀석 하는 말이라니.

녀석은 장차 그래픽노블작가가 되는 게 꿈이다.

녀석 눈에 딸기정도야 식은 죽 먹기일테지만 드로잉 초보인 내게는 그 자유롭게라는 말이 선뜻 와닿지 않는다.

그래. 이것도 내 식이다. 딸기를 자세히 봐야 딸기가 보이지. 풀꽃도 자세히 봐야 예쁜 것처럼, 왠지 그림 초보는 그래야 할 거 같고 그게 좋아하는 딸기에 대한 예의지 싶다.

4B연필을 쥐고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린다.

풍경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이깟 딸기 몇 알 하며 쉽게 봤는데 결코 쉽지 않다. 이게 뭐라고 밥 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다행히 집엔 작은 녀석만 있어 저녁은 적당히 라면으로 때웠다.

대충 완성된 딸기 모양을 면봉으로 문질문질다. 신기하다. 면봉이 지나가니 젖살 오른 아이처럼 과육 느낌이 나 제법 딸기답다.

이번에도 면봉이 열일했네.

면봉은 유치원 아이들 수업에도 자주 쓰인다. 면봉을 여러 개 묶어 물감 찍기를 하거나 꽃이나 나뭇잎을 표현할 때도 요긴하고 아이들도 놀이처럼 좋아한다.


"오, 잘 그렸네! 씨 느낌이 살아 있어!"

언제 왔는지 내 뒤에 서 있던 녀석의 립서비스에 갑자기

박하사탕을 은 듯 환해지면서

식물세밀화가 이소영 작가가 생각났다.





<식물산책>을 출간한 이소영 작가는 식물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밀도 있게 잘 그리기로 유명한 작가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녀는 딸기를 제대로 그리기 위해 딸기 한 알에 박힌 씨를 일일 다 세 봤고 씨가 무려 200 개가 넘는다는 걸 알았단다.


그 얘길 듣고 관찰력이 대단하단 생각을 했었다. 그 후론 씨가 배 밖으로 나온 딸기를 보면 식물세밀화를 그리는 이소영 작가가 떠오르곤 한다.


이렇게 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코로나 때문이다. 아니, 코로나 덕분이라고 해야겠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혼자 놀이로 혼자 무턱대고 마냥 그렸다. 지금 생각하니 이렇게 그릴 수 있는 것도 다 연필을 무지 좋아해서 가능했던 것 같다.


이상하게 연필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다.

내가 그린 딸기 그림에서 딸기 느낌이 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