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소금을 잡아야 통치한다

이하나 작가

소금이 독가스가 된다고?


<삼국사기>와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고구려지방과 옥저에 소금 얘기가 등장한다. 추측컨대 바닷물을 끓이는 자염법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동해안의 소금을 운반해 사용했고, 신라는 산성에 소금을 저장하는 등 왕실에서 소금을 관장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도염원이라는 관청을 두어 소금에 관한 행정을 관할했다. 왕이 상으로 소금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정종때는 수해를 입은 백성에게 쌀과 소금을 내어주라고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전적으로 소금을 통제하다 무신집권기를 지나 충렬왕이 각염법을 시행해 소금에 세금을 메겨 국가의 소득으로 활용했다. 이때 소금에 붙은 세금은 소금 생산자와 민중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어 생산자는 줄고 백성은 자유롭게 소금을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후 충선왕이 소금제도를 개선하였다. 기득권들이 독점해 온 소금에 대한 권한을 관이 접수하고, 소금에 대한 행정을 일원화한다. 이후 소금의 가격을 균등하게 정하고 개인이 소금을 더 사려고 하면 은이나 포(직물)로 소금을 사거나 관에 포를 바치고 소금으로 바꿔주는 방식을 택했다. 이때의 소금 생산지는 양광도(지금의 서울, 경기), 경상도, 전라도의 남해안과 서해안에 집중돼 있었다. 일본 왜구의 침략으로 해안가가 피해를 입게 되면 소금 생산량이 급감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다.


브런치_8편.jpg 일제강점기 당시 인천의 주안염전_인천시


조선에서도 소금을 국가가 통제하고 따로 보관하였다. 포(직물)뿐 아니라 쌀로도 소금을 바꿀 수 있게 하고, 태종 때는 잡곡도 교환수단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러자 백성들은 보다 쉽게 소금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 때에는 국가의 소금 통제가 문란해지면서 다시 소금이 귀해졌다. 세종과 관료들은 소금에 대한 대책을 논의해, 새로운 관청을 세워 소금을 관리하기로 하였다. 조선의 소금 산업은 고려 때보다 번창했다. 양광도, 경상도, 전라도에 이서 황해도와 평안도, 함길도(함경도 지역)에서도 소금을 생산했다. 바닷물을 끓여 소금물을 생산하는 방식이라 생산량은 높지 않았다. 국가는 민간에서 누군가 소금을 독점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늘 강경한 정책을 폈고 소금의 생산자까지도 국가에서 관리했다.


영조 때에 이르러서야 균역법을 실시하며 소금에 대한 정책도 바꿨다. 소금 생산자의 어려움도 덜고 백성들도 소금을 구하기 쉽도록 세금을 매기되 조금 낮추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이라는 두 번의 큰 전쟁을 거치며 소금에 대한 세금이 차츰 늘어났고 소금 생산자들은 혹사당했다. 땔감도 부족해지니 다시 소금이 귀해졌다.


조선 후기에 일본과 중국에서 소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공식적인 무역도 있었지만 밀수도 상당했다. 수입산 소금은 훨씬 값이 싸서, 조선의 소금 산업은 차차 쇠퇴했다. 1906년, 염세규정이 발표되면서 소금생산자는 허가를 받아 세금을 적게 부담하며 소금을 생산하게 되었는데, 그 이듬해 일제의 개입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1907년 인천 주안에 천일염전을 실험적으로 만들고 1909년 소금 생산에 성공한다.


브런치_8편_01.jpg 일제강점기 당시 인천항_우리역사넷


천일염의 성공적인 생산에 고무된 조선총독부는 인삼, 소금, 담배를 조선총독부의 수입원으로 결정한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제국은 천일염전을 철저히 통제한다. 소규모 자염이 설 자리를 잃게 되니 일제의 통제 아래 들어간 천일염전에서만 대규모 소금 생산이 가능해졌다. 1917년부터는 총독부가 판매도 통제하며 직영판매로만 가능하게 만든다. 1921년에는 조선연초전매령과 함께 전매국이 개편하면서 서울과 대구, 전주와 평양에 전매지국을 설치하고, 1930년 소금 업무가 모두 전매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들이 인천 주안과 소래 인근에 염전을 만든 것도 수인선과 수여선 철도를 통해 운반과 수탈이 쉬웠기 때문이다. 일제는 한강 이북지역에 염전을 집중적으로 확장한다. 수원과 인천을 잇는 수인선이 1937년에 개통되는데, 서해안 소금과 수산물을 싣고 제물포항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제물포항에는 수원과 여주를 잇는 수여선을 타고 온 쌀과 곡식, 나무가 가득했다.


현재 인천의 ‘잇다스페이스’는 과거 소금창고였고, ‘팥알(Pot-R)’ 자리는 쌀창고를 관리하는 노동자 숙소였다. 동인천 제물포항 부근은 일제의 수탈에 동원된 노동자들이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소금은 식품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공업시설에서도 필요한 성분이다. 일제는 단지 먹기 위해서만 소금을 생산한 것이 아니다. 소금에 함유되어 있는 마그네슘이 군수물자 생산에 필수적이라 소금생산에 박차를 가하였다.


브런치_8편_02.jpg 태평염전에 있는 해주의 모습_이하나 작가


1933년 일본의 여러 언론은 “독가스 제조용 소금을 중국에 팔다”는 제목의 기사를 쏟아냈다. 일본의 한 민간인이 수만 톤의 소금을 중국 군벌에게 몰래 팔아넘기려다가 잡힌 사건을 다룬 것인데, 일본의 언론은 소금에 ‘독가스 제조용’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이는 소금이 군수물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1929년부터 세계 대공황이 밀어닥치면서 유럽산 수입 소다제품 가격이 급상승했다. 반사이익으로 소다회, 가성소다, 표백분 등을 생산하는 일본의 화학공업이 성장했는데 그 원료 역시 천일염이었다. 1937년, 대일본염업주식회사가 조선에 진출한다. 이들은 공업용 소금을 생산하고 금속 마그네슘 공장을 설립하였다. 1929년 이미 설립한 조선염업주식회사, 조선제염공업주식회사 등 일본의 민간기업들은 총독부의 지원을 받으며 소래염전 등을 거의 무상으로 임대해 소금을 생산했다. 조선총독부는 소금을 모두 관에서 관리하겠다고 했지만 일본기업은 예외였다.


이들이 눈독 들인 것은 천일염전에서 소금을 만들기 위해 설치한 해주에 있는 염수다. 지금도 염전에는 이 해주가 있다. 염전 사이에 숨어있는 지붕만 남아있는 것 같은 건조물을 해주라고 한다. 이 해주에는 20보메(Baumé - 소금물농도를 측정하는 단위) 정도의 고농축된 함수를 저장하고 있다. 쉽게 말해 소금의 씨앗, 간장으로 치면 씨간장 같은 종자다. 여기 있는 고농도 함수를 새롭게 들어온 바닷물에 섞어 해수의 농도를 높이는 것이다. 이 함수를 고즙(苦汁)이라고도 부른다.


이 고즙은 소금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소다와 금속 마그네슘, 브롬을 생산하는 원료였다. 당시 함경남도에는 금속마그네슘을 추출할 마그네사이트가 풍부했고, 천일염전의 고즙 역시 전쟁을 준비하는 일본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자원이었다. 브롬은 진정제, 지한제, 해열제, 수면제 등의 약품을 생산하는 원료이며 화학전에 쓸 수 있는 독가스의 원료였다. 고즙에서 각종 산물을 얻어낼 때 황산마그네슘과 칼륨비료의 원료가 되는 카널라이트도 얻을 수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일제는 염전에서 뽑아낼 수 있는 고즙을 애지중지했다. 그러나 고즙을 계속 뽑아가면 소금은 생산할 수 없게 된다. 씨앗이 없는데 싹을 틔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940년대 이후 일본이 조선땅에 방대한 천일염전을 조성했으나 실제 소금생산량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염전이 그렇게 많은데 왜 소금이 없는가. 당시 보고서에는 고즙 채취로 인해 식용소금의 생산량이 줄어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는 1942년 전쟁을 준비하면서 소금과 공업용 소금 모두 배급통제를 시작한다.


이때의 고즙 유출로 인해 해방 이후에 천일염전에서 바로 소금을 생산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민간에서 생산하던 자염은 맥을 못추고 쓰러지면서 소금 품귀마저 겪어야 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과 가혹한 수탈로 인해 이 땅의 소금마저 명맥이 끊길 뻔하였다.




※ 참고문헌


전시체제기 조선 염업의 공업화 과정과 일본 독점 자본의 침투 (류창호, 2021)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소래염전 소금창고와 부속시설물을 통해 본 근대산업유산의 가치 (류창호, 2024)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과 소금 (김삼웅,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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