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스믜집_바람이 지나간다

주은 작가

브런치_12편.jpg 스믜집 풍경_photo by 박여선 작가


바싹 마른 소금 한 줌을 댓돌에 뿌린 듯, 바람이 연못의 부들을 쓸며 지나간다. 공사 중인 옆 건물에 부려 둔 각종 집기를 넘어뜨린다.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쥐고 흔들더니 해바라기가 만개한 벌판을 써레질 하듯 훑는다. 구름을 몰고 어딘가로 가자. 바람의 중얼거림이 들리는 것 같다. 비가 올 듯 말 듯, 습한 공기를 놓아두고 달아난다. 이곳에 고인 여름은 절정에 다다랐고 나는 창문 너머 낮고 흐린 하늘을 응시한다. 사각 창틀에 들어와 고정된 하늘, 증도의 저 멀리 산 능선이 실루엣으로 그려진다. 삼각 지붕, 처마의 수평선, 사각 창틀, 바닥 데크의 수평선, 칸막이 벽의 수직선을 본떠서 지었다는 스믜집(ㅅㅡㅁㅡㅣ집). 근처 나무에서 종일 귀뚜라미가 울고 지극한 아름다움에 안도감을 느낀다.


“곡도길로 가시오. 곡도를 찾으시오.”


지난 밤 우리 일행은 전화기 너머의 말을 더듬어 길을 찾았다. 날은 흐렸고 별이나 달마저 없는 칠흙 같은 밤이었다. 해가 지는 것과 동시에 증도의 하루도 끝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드문드문 희미한 불을 밝힌 인가를 헤매며, 일대를 빙빙 돌면서도 스믜집이 갈대 숲에 가려져 있었던 낮의 풍경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스믜집을 찾으려고 애썼다.


끝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잠깐의 소요가 도시에서의 삶이 익숙한 사람들에게 자연이 주는 조용한 경고라고 여겨졌다. 어두워도 하루가 끝나지 않는 삶을 얼마나 오래 살았던가. 너의 삶을 돌아보아라. 너의 복잡함, 너의 여유 없음을, 나의 마음이 나를 질타하는 소리를 들으며 어두운 밤길을 헤매다 울고 싶어졌다. 길을 못 찾아서가 아니었다 그간 내가 무엇을 잊고 있었던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환희였다.

여러 겹 포개어진 기억을 하나씩 꺼내 맛보고 깨달아가는 감각, 자연이 내게 주었던 잊고 있었던 언어를

하나씩 깨우는 기쁨. 생생함, 비로소 나 여기서 살아있음을.


브런치_12편_01.jpg 스믜집 전경_photo by 박여선 작가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곡도길 9-43.


초행길이라면 찾기 어려울 법한 외진 곳에 염부(塩夫)가 살았던 집이 있다. 광주 방향 대로변을 따라 태평염전의 소금박물관을 지나 조금 달리다 보면 ‘곡도’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그것을 발견할 즈음 속도를 늦춰 왼편 갈대숲 사잇길로 접어든다. 차가 들어갈 만한 길인가 의심스러운 좁은 길에 접어들면 갈대 부들과 수련이 가득한 연못이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나지막한 지붕의 기다란 집 두 동이 펼쳐진다.


염부와 그 가족이 살았던 곡도 염부사택. 지금은 예술가를 위한 레지던시가 된 스믜집이 나타난다.

태평염전의 곡도 염부 사택은 8가구씩 사는 건물 2동으로 이뤄졌다. 가구당 작은방과 거실을 겸한 큰방, 부엌, 연탄을 쌓아 놓던 작은 창고가 있었다. 1986년 염전 인부를 위한 숙소로 건축됐다가 장기간 폐가로 방치되었다. 철거하다 만 상태여서 부서진 지붕, 깨진 벽체만 남았지만 2019년 아트프로젝트 ‘소금같은 예술’에 참여하는 예술가를 위한 숙소로 논의되면서 2021년초 홍익대 건축학과 조웅희 건축가에 의해 리모델링이 시작되었다. 2022년 6월 스믜집은 염전 주변의 갈대숲 사이에서 수십 년 동안 해풍을 맞으며 자연의 일부였던 인부 숙소가 역사와 자연을 상징하고 과거 생활 흔적을 최대한 보존한 새로운 건축물로 완성되었다.


브런치_12편.jpg


스믜집은 이제 작업할 시간과 장소를 제공하는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인 ‘소금 같은, 예술’의 공모에 선정된 작가가 12주간 스믜집에 머물며 자연과 염전에서 받은 영감을 예술에 투영하는 활동 장소로 제공된다. 완성된 작품은 소금박물관에서 전시한다. 한때 염전 노동자의 휴식처였고 삶이었고 전부였던 곳이지만 이제는 예술가가 그 의미를 이어간다. 스믜집은 지역의 자연과 역사를 상징하는 장소로 아트프로젝트 사업을 더욱 빛나게 한다.


<스믜집>

photo by 박여선 작가


photo by 박여선 작가













“소금을 물감 위에 놓으면 삼투압 작용으로 물이 움직여요. 서로 끌어당기며 무늬를 만들거든요. 소금이라는 물질 자체를 다뤄보는 거죠. 물질의 활동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무늬에 관심을 두고 작업하고 있어요. 소금의 양에 따라서 달라지는 물질의 양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표현해 보고 있어요.”


스믜집에 머물며 작업중인 신현정 작가는 염색 작업을 주로 하는 작가이지만 증도에 와서 소금이라는 물질을 통해 새로운 세계와 만났다고 한다. 작가 연구와 기획, 독립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배은아 씨는 공간을 통해 세계를 확장하는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라고 한다. 그의 에너지 원천은 작가들인데 오래 작업을 지켜본 신현정 작가가 증도와 스믜집에서 어떤 영감을 받고, 이곳의 어떤 에너지가 작품의 원천으로 작용될지 자못 궁금하다고 한다.


박보나 작가는 스믜집에 도착한 이후 주변을 돌아보며 삶의 ‘새삼스러운’ 신비로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도시에서 살면 느낄 수 없었던 삶의 평이한 기척들이 매 순간 새롭게 각인되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젖은 흙의 변화 등을 통해 삶의 역동성과 생동감 같은 것. 그것을 통해 감지되는 일상의 변화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브런치_12편_03.jpg photo by 박여선 작가


스믜집은 원래 있었던 장소, 사용되었던 용도를 어떻게 잘 살릴까 고민한 건축가의 마음이 스며든 건물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과의 세계를, 세상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고민하게 만든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 지어놓은 건물 안에 들어가 산다.

운이 좋다면 애정을 듬뿍 담은 건축가의 지극한 마음속에서 살다 갈 수도 있다.

이런 생각에 이르면 내가 이 세계와 단단하게 묶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 삶으로 만들어 놓은 풍경 속에서 살아왔고 살아간다. 이러한 고요의 서정에서 나는 우주를 관통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11. 증도 소금 장인 인터뷰_'천일염, 제대로 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