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소금으로 꿈꾸는 유토피아_태평염전

김경환 작가

태평염전의 역사는 1985년 손말철 당시 삼선개발 회장(2004년 8월 작고)이 대평염업을 인수하면서 시작된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정부는 피란민을 정착시키고 소금생산을 늘리기 위해 신안군 증도에서 제방을 축조하고 염전을 조성했다. 이 염전을 척방산업이 관리하다가 1963년 민영화되면서 대평염업이 인수한다. 이후 대평염업은 경영악화로 문을 닫았는데, 이를 손 회장이 인수한 것이다. 손 회장은 세계 제일의 소금을 생산해 증도 일대를 유토피아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회사 이름을 태평염전으로 정했다. 태평염전은 국내 최대 규모의 단일염전으로, 여의도 면적의 두 배인 140만 평에 달했다.


유토피아를 꿈꾸며

손말철 선대 회장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1958년 무일푼으로 상경한 그는 어느 국립병원 원무과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저축해 사업밑천을 모았다. 잠은 친구 집에서, 밥은 병원에서 해결했다. ’왕소금‘ 소리까지 들으며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1960년대 초 금은방을 열었고, 사업이 번창하면서 청과물·주유소·택시 등으로 확장했다. 1976년에는 부동산 개발업체 삼선개발을 창립했다. 새로운 사업을 찾던 그는 신안군 증도에서 우연히 버려진 염전을 발견하고 이를 인수한다.


손 회장이 폐염전을 인수한 1980년대는 정부가 ‘정제염’을 장려하던 시절이었다. 정제염은 바닷물을 전기분해해 얻은 인공 소금이다. 염도가 높고 가격이 저렴해 식품업체에서 주로 사용했다. 반면에 태평염전이 생산하는 천일염은 당시 ‘광물’(鑛物)로 분류되었고, 가격도 싸지 않고 품질도 일정치 않아 판로를 찾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손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손일선 현 회장)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 폐염전이 머지않은 미래에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손 회장의 바람과 달리 아들은 염전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1986년 처음으로 증도를 찾았다. 당시 증도는 너무 멀었다. 장장 15시간 동안 버스를 여러 차례 갈아탄 후 배까지 타고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자랑하던 염전과 황량한 갯벌을 직접 본 아들은 절망했다. “이곳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유배지다.”


1988년 군 복무를 마친 아들은 말단직원으로 태평염전에 입사했다. 유학을 떠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그는 낮에는 염전에서, 밤에는 관리 업무를 도맡아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1년 만에 염전에서 벗어나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갑상선에 문제가 생겼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갑상선 치료를 마친 그는 내 친 김에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MBA 과정을 마친 그는 다시 태평염전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간절한 청을 차마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오랜만에 돌아온 태평염전 사정은 이전보다 더 나빠져 있었다.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가 체결 후 값싼 해외소금이 대량수입되면서 국내 소금값이 폭락한 것이다. 태평염전은 1997년 7월 66개 염판 중 8개(43만여 평)를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손 회장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2000년 태평염전(태평소금) 대표 자리에 올랐다.


천일염의 세계화

소금산업의 최전선에 뛰어든 손일선 회장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책이 있었다. 바로 <게랑드의 소금 이야기>라는 책이다. 단숨에 책을 읽은 손 회장은 “천일염 사업도 가치가 있고 미래 발전 가능성이 크구나”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손 회장은 직접 게랑드 염전에 가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2000년 초반 그는 학계 인사, 식약청 고위관계자 등 10여 명과 함께 게랑드 염전을 방문했다. 그는 게랑드 염전 사람들을 만나보고 크게 감명받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친환경적 생산방식이었다. 그들은 염전에서 자라는 식물을 자연 그대로 두었다. 소금에 묻은 갯벌도 분리하지 않았다. 소금은 그들에게 ‘생태계’ 그 자체였다.


“게랑드 염전의 초입에는 소금장인의 집, 염의 대지, 소금박물관 등 소금의 역사를 읽을 수 있는 박물관이 있더라고요. 훌륭한 소금을 만들고 있다는 자부심이 몸과 마음으로 느껴졌죠. ‘태평염전을 이끌고 있는 나는 뭔가’라는 자책까지 들었습니다.”


2007년은 천일염 산업에서 역사적인 해다. '염관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그동안 '광물'로 분류됐던 천일염이 마침내 '식품'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때부터 김장할 때 국내산 천일염을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는 손일선 회장의 노고를 빼놓을 수 없다.


손 회장은 또 천일염의 가치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데 매달렸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2003년 목포대에 '천일염 연구센터'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연구센터에서는 2006년 국내산 천일염에 인체에 필요한 80여 종의 미네랄이 함유돼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전남도는 2005년 '천일염 산업화 중장기 비전'을 만들었다. 또 2013년에는 증도에서 세계 천일염 엑스포를 열었다.


손 회장은 세계 시장에도 눈을 돌렸다. 그는 국내에서 처음 '수출'을 시도했다. 문제는 품질 고급화였다. 이를 위해 그는 연간 ‘가는소금’ 3000톤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춘다. 또 자체 브랜드와 디자인을 개발하면서 급화에 나섰다. 직원 교육도 강화했다. 2005년부터 품질관리 등 32개 기준에 따라 엄격하게 ‘소금장인’을 선발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마침내 2008년 일본 등 여러 나라에 천일염을 수출할 수 있었다.


브런치 22편.jpg 신안 증도에 위치한 소금박물관 전경


천일염 가치가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품질도 좋아졌지만 국내 인지도는 여전히 낮았다. 고심을 거듭하던 손 회장은 염전을 관광 상품화하기로 한다. 그는 반대를 무릅쓰고 2007년 7월 국내 최초로 소금박물관을 열었다. 옛 소금창고를 개조해 만든 소금박물관은 근대문화유산 361호에 등록됐다. 이곳은 연간 10만 명이 다녀가는 명소가 되었다.


브런치 22편_01.jpg 태평염전 염생식물원의 가을 풍경
태평염전 소금항카페 전경


염생식물원, 소금항카페, 스믜집 등 소금과 문화 예술을 접목한 태평염전의 도전은 계속 이어졌다. 초미세소금과 고농도미네랄 농축액을 바탕으로 미용제품 등을 개발해 미래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다. 손 회장은 2018년 천일염의 식품화와 선진화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제12회 장보고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브런치_22편.png 2018년, ‘제12회 장보고대상’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손일선 회장 모습(사진 기준 우측)



프랑스 명품 소금 게랑드를 뛰어넘는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어 천일염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손일선 회장, 그는 아버지의 꿈, 소금으로 만드는 유토피아에 한 걸음 다가서고 있다.




※ 참고문헌/사진 자료

도서

<게랑드의 소금 이야기>(시그마프레스) 2008년


언론보도

<경향신문> ‘소금밭 유토피아서 보석 같은 문화 캐다’ 2010년 6월 2일

<이코노미스트> ‘손일선 태평염전 회장 - 염전의 아들 ‘소금왕’ 꿈꾸다‘ 2012년 4월 2일

<내일신문> ’장보고대상-대통령상 손일선 태평염전 회장-소금에 미쳐 염전경영 나선 2세‘ 2014년 12월 14일

<식품저널> ‘명품 천일염 생산 앞장서는 손일선 태평염전 회장 2016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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