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환 작가
슬로시티 증도에 예술을불어넣다.
나는 지난 8월 초에 2박3일 일정으로 신안군 증도를 방문한 적 있다. 그곳에서 나는 염전과 갯벌은 물론 다양한 문화공간과 예술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대단한 성취를 보면서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누가 이토록 놀라운 기획을 하고 실행에 옮긴 것일까. 2025년 9월 18일(목) 오전 10시 서울시 중구 퇴계로 삼선빌딩 13층에서 김상일 대표를 만났다.
하얀 와이셔츠 위에 남색 블레이저를 걸친 준수한 외모의 노 신사. 청바지와 은발이 어울리는 김상일 대표는 첫눈에도 패션이나 엔터테인먼트 업계 종사자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1992년 월트디즈니코리아 설립 당시 초대 영화사업부 사장으로 취임해 14년간 종사한, 우리 영화 산업의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3차원(3D) 애니메이션이라는 개념이 모호할 때 '토이스토리 1'을 3D로 국내에 선보였고, 외국 영화 배급사 중 최초로 한국 영화(남자의 향기)도 배급했다. 또 2002년 개봉한 배우 하지원 주연의 영화 '폰' 제작비를 국내 영화 배급사에게서 모으는 등 펀딩에도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2006년 월트디즈니코리아를 나온 그는 영화 제작·배급사인 프라임엔터테인먼트 대표와 캐슬파인골프장 사장 등을 거친 후 2012년부터 태평소금의 경영을 맡아 청년처럼 달리고 있다. 고 손말철 태평염창업주가 그의 외삼촌이다.
“어느 날 선대 회장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야 염전 가자’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절대 못 간다, 할 일이 너무 많다’고 거절했어요. 그 후에도 계속 입사를 권유했지만 그때는 눈길도 주지 않았어요. 영화 일이 너무 좋고 행복했거든요. 그러다가 결국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지요.(웃음)”
그가 태평염전 대표를 맡은 지 14년이 지났다. 그 사이 천일염 전도사로 변신한 그가 태평염전의 변화를 앞장서서 이끌고 있다. 염전에 예술의 입김을 불어넣은 것이 바로 그였다. 그는 "인류의 생명은 소금에서 시작됐고, 소금은 생명 유지를 위한 필수 물질"이라며 "양질의 소금을 생산·공급하는 것은 세계 역사 발전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소금이 1차 산업이잖아요. 농사처럼 하늘만 바라보고 사는 건데, 이것만 해서는 못 먹고 산다, 그래서 소금아이스크림이나 소금빵 같은 먹거리도 개발하고, 소금창고를 개조해 박물관을 만들고, 갯벌과 염전 체험프로그램을 만들어 사람들이 오가게 만들었어요. 저도 그렇지만 손일선 회장이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아요. 소금산업은 문화 산업이다, 우리는 앞으로 그 방향으로 가는 게 맞다고 봅니다.”
갯벌과 바다밖에 없던 외딴 섬 증도는 태평염전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달라진다. 버려졌던 염전이 되살아나고, 소금창고가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염생식물 가득한 갯벌에 산책길이 깔리고, 소금배 오가던 항구에 카페가 들어섰다. 천일염 캠핑장과 소금동굴, 스파시설을 만들어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증도는 이제 입소문을 타고 전국에서 연간 40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그때가 2005년인가. 손 회장과 둘이 앉아서 태평염전을 어떻게 하면 좀 차별화할 수 있을까, 유니크하게 만들 수 있을까, 사람이 오게 만들까 궁리하다가 슬로시티에 한 번 가입해보자. 죽이 맞아서 몇몇 교수들과 함께 이탈리아 국제슬로시티본부를 찾아갔습니다. 갯벌과 염전의 생태적 가치, 문화적 가치, 지역을 열심히 알렸지요. 그렇게 3년 동안 끈질기게 설득해서 마침내 2007년 증도가 슬로시티로 승인됐습니다.”
영어로 슬로시티(Slow City), 이탈리아어로 치따슬로(Cittaslow)는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도시 운동으로, '느리게 살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의 피나는 노력으로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신안군 증도가 슬로시티로 선정되었다. 천일염과 갯벌생태계, 한국의 천일염전(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360호)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2017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할 때 제가 그랬어요. 광주에서 신안은 한 시간 거리밖에 안되는데, 왜 굳이 지역을 광주로 국한하느냐, 신안까지 확장하자, 꼬셨지요. 그렇게 소금창고로 쓰던 곳을 전시장으로 썼지요. 그랬더니 작가들이 너무 좋아해요. 아주 푹 빠졌어. 외국 작가들이 보고 깜짝 놀라요. 어떻게 이런 데가 다 있냐고. 70여 년 동안 소금 창고로 쓰던 곳이니까 습도도 맞고 좀 서늘한 기운, 소금 에너지가 느껴진 겁니다. 그때 이후로 매년 외국 작가들을 초대해 전시하고 있어요. 벌써 8년 넘었네요.”
공교롭게도 2017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주제는 ‘미래들’이었다. 소주제가 ‘생태 발자국’, ‘신재생에너지’, ‘한국의 미래’ 등이었는데, 오래된 소금창고 갤러리가 제격이었다. 김 대표의 경험과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스믜집, 그곳도 염부들이 살다가 떠난 후 비어 있었던 거예요. 제가 한두 칸 고쳐 쓰다가, 저걸 한번 재탄생 시켜 보자. 그렇게 건축가에게 디자인을 맡겼는데, 아주 멋지게 나왔어요. 이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많은 상을 수상하고. 이탈리아 잡지에 소개되면서 외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한국의 외딴 시골에 있는 작은 건물을 세계가 주목한 거죠.”
그의 말을 들으면서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지역적이다’라를 말이 떠올랐다. ‘스믜집’은 애초 태평염전이 주최하고 램프랩이 주관하는 아트 프로젝트 ‘소금 같은, 예술’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위한 예술가의 집으로 계획되었다. 조용한 갈대 숲에 자리 잡은 이 건물은 1986년 염전 인부들 숙소로 쓰이다가 장기간 폐가로 방치돼 있었다. 그러다가 낡은 건물의 흔적을 최대한 보존해 태평염전의 역사와 자연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재탄생하였다.
“섬 공간 여기저기 흩어진 예술작품을 한 번에 꿰야 하는데, 무엇으로 꿸 수 있을지.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게랑드가 1천 년이 넘었다는데 거기 비하면 우린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이지요. 사람들이 아직은 잘 모르는데, 천일염은 정말 보배이자 우리의 미래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 증도는 유토피아가 돼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 대표는 요즘 스믜집 뒤편 버려진 물탱크에 주목한다. 그곳을 두세 평 정도의 명상공간으로 바꾸고 싶어 한다. 또 갯벌 일부에 태양광 발전소 설치할 예정인데, 어떻게 하면 변전시설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와 독일 출장까지 앞두고 있다. 예술적 열정과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증도를 캔버스 삼아 거침없이 디자인하는 김 대표. 그에게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