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소금과 인류 문명

김경환 작가


모든 길은 소금으로 통한다

인류의 문명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소금. 동양과 서양 모두 소금을 인체의 필수 영양소로 인식했고, 식량 보존에 사용했다. 소금은 곡물과 함께 생존의 필수품으로 여겨졌다. 소금을 경제적 가치로 인식하고 통제수단으로 사용한 것도 비슷하다. 중국의 소금 전매제는 무려 2천700년이나 지속되며 국가운영과 전쟁의 재원으로 쓰였다. 로마 또한 ‘소금세를 거뒀고 군인 급여를 소금으로 지급했다. 악명 높은 프랑스의 소금세(가벨)가 시민혁명의 원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소금은 국가 재정과 권력 유지의 핵심 수단이었다.


소금우물과 소금길

동양은 염호(소금 호수), 지하 암염, 해수 증발 등에서 소금을 생산한 반면, 유럽 국가들은 암염, 지천일염 방식으로 소금을 조달했다. 소금은 지형과 기후에 따라 생산방식이 달라진다. 중국에서는 국가가 소금을 철저히 통제하며 권력 유지와 국가 재정 기반으로 삼아 민란이 끊이지 않았고, 로마제국은 군대 유지와 도로 건설 등 행정 자금으로 주로 사용했다. 베네치아는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는데, 소금 무역을 독점하면서 강대한 도시국가로 성장했다.


동양에서는 소금을 장수, 부귀, 부정 방지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제사와 의례에도 빠지지 않았다. 서양에서는 소금을 신성, 순수, 약속의 상징으로 여겼다. '빛과 소금'처럼 도덕과 종교를 구성하는 핵심 자원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소금을 활용한 발효문화(된장, 간장, 김치 등)가 유럽에서는 염장문화(햄, 소시지, 절인 대구와 청어 등)가 발달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금은 정치·경제적, 생활·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물질이었다.


드넓은 중국의 내륙에서는 소금을 얻기 어려웠기에 소금우물과 소금호수가 중요한 소금 공급원 역할을 했다. 소금우물은 땅을 깊이 파서 염수를 퍼낸 뒤 증발시켜 소금을 얻는 방식을 말한다. 특히 쓰촨(四川) 지역은 소금 우물 개발과 천연가스를 이용한 소금제조 기술이 발달한 지역이다. 쓰촨시 자공(自贡) 지역은 ‘천년염도’(千年盐都)라고 불릴 만큼 소금 생산의 역사가 길다. 이곳에서는 무려 깊이 1천 미터가 넘는 인공 우물을 개척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무려 1천300년의 역사를 지닌 소금우물은 고대 중국의 기술과 과학이 총동원된 복합적인 산업이었다. 지층에서 염수를 끌어 올릴 때 목조 구조물 천자가 사용되었고, 당시 개발한 소금 건조기술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고 알려졌다.


로마에 ‘비아 살라리아’가 있다면 고대 중국에는 소금길(Salt Road)이 있었다. 소금길은 생산지(쓰찬, 운남, 티베트)에서 대도시와 군사 요충지까지 소금을 운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통·무역로이다. 대표적인 소금길로 자공 소금길, 운남-티베트 소금길, 산시 소금길 등이 있다. 자공에서 생산한 소금은 장강의 수운과 육로를 거쳐 후베이, 후난, 구이저우 등지로 운송되었는데, 이 길은 쓰촨 경제의 대동맥 역할을 하며 국가 재정에 기여했다. 운남-티베트 소금길은 차마고도와 연결된다. 운남성 옌징에서 생산된 소금은 차마고도를 거쳐 티베트로 운송되었다.


소금은 차와 함께 티베트인의 필수품이었기 때문에 차와 말, 소금이 교역의 주요한 품목이었다. 소금길을 따라 유목민족인 몽골에도 차와 소금이 들어갔고, 말과 모피, 유제품과 교환했다. 몽고인들은 말과 양의 젖에 소금을 넣어 차로 마셨다. 차마고도가 소금길이었다.


산시성에는 거대한 소금호수가 있었다. 이곳의 소금을 내륙으로 운반하는 과정에서 '염상(鹽商)'이 등장했다. 이들은 소금으로 얻은 재력을 바탕으로 금융과 운송을 장악하면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다.


모리시오와 액막이

섬나라 일본은 주로 바다를 이용해 소금을 생산했다. 고대에는 귀족·사원 세력이 소금 생산을 장악했고, 전국시대에는 다이묘들이 지역 독점권을 행사했다. 에도 막부도 소금 유통을 통제하고 재정적 기반으로 삼았다. 다이묘들 사이에 소금을 둘러싼 갈등이 폭발해 ‘소금 전쟁(塩の戦い)’이 벌어지기도 했다. 1905년 메이지 유신 이후 소금 전매제를 도입했고, 1975년에 이르러서 이를 해제한다.


일본에는 신사 입구나 제사에서 소금을 뿌려 악귀를 막는 ‘모리시오(盛り塩)’ 풍습이 있었다. 모리는 ‘더미’, ‘시오’는 소금을 뜻한다. 지금도 이 풍습이 남아서 집이나 가게 입구에 소금을 두면 복을 부른다고 여긴다.


우리나라에서도 소금은 국가의 재원이자 교역의 중요한 물품이었다. 삼면이 바다이고 자염(煮鹽) 기술이 발달해 소금생산은 비교적 풍부한 편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소금은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삼국사기>에 신라가 바닷가에서 소금을 생산해 내륙으로 공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구려와 백제도 해안 지역을 전략적으로 관리했다.


고대 한국에 전매제가 도입된 것은 고려 말이었고 조선 세종 때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국가가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 관리하면서 종종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갯벌이 있는 서해·남해 연안 어민들이 몰래 소금을 유통하면서 지방 관리들과 충돌하고 소금가격을 올리는 바람에 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조선의 소금 생산과 유통을 철저히 통제하고, 천일염전을 개발, 운영하면서 막대한 양의 소금을 일본 본토나 군대로 실어 날랐다.


일본에 모리시오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액막이가 있었다. 제례에 소금을 올리거나 소금을 뿌려 부정한 기운을 물리치는 액막이를 했다. 새 집에 입주할 때 소금을 뿌려 잡귀와 액운을 막았고, 상가를 개업할 때 소금과 쌀을 뿌리며 잡귀가 들어오지 않기를 기원했다. 집터를 닦을 때도 사방에 소금을 뿌려 부정한 기운을 없앴다. 정월 대보름에는 집 안팎에 소금을 뿌려 한 해의 액운을 막고 복을 불렀다.


소금의 중요성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보편적 중요성을 지녔다. 소금은 생존의 필수 자원이자 국가의 재정이었기에 군비 충당, 교역로 형성, 종교적 상징 등 다방면에 걸쳐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약간의 차이점도 있는데, 동양에서는 강력한 통치의 기반이자 민족 신앙 형성에 기여했고, 서양에서는 군사와 상업의 발달, 사회혁명의 불씨로 기능했다.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이후 소금은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앞으로도 소금은 인류와 함께 미래로 걸어갈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29. 소금과 인류 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