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염장

주은 작가

김장 준비가 한창이다. 배추를 절이려고 수돗가에 커다란 들통 여러 개가 옮겨져 있다. 두 자루의 소금 입구는 풀어져 있고 엄마가 커다란 바가지로 푹푹 희고 굶은 소금을 퍼서 물이 잠긴 통에 쏟아붓는다. 희고 매캐한 기포가 수면 위에서 폭폭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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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저장하는 기술

“이게 3년 묵은 소금이다. 쓴 맛을 빼야 절인 배추 맛도 좋다.”


밭에서는 도려진 배추가 흰 밑동을 드러낸 채 누워있다. 쉼 없이 아버지가 외발 수레로 배추를 실어날라 소금물 근처에 불려 놓으면 엄마가 겉잎을 떼고 반을 가른 후 소금물이 잘 스며들도록 밑동에 크게 칼집을 낸다. 줄기가 두꺼운 부분을 들춰 소금을 조금 치고는 양손으로 배추를 움켜쥐고 물속에 담근다. 꾸르룩, 소금물이 배춧잎 사이로 들어찬다.


배추는 8~10% 정도의 농도에서 절여진다. 소금은 몇 년 전에 사둔 것을 사용한다. 그 해 생산된 소금을 사용하지 않고 몇 년 두어 간수를 빼면 쓴맛을 내는 성분이 없어진다. 이를 뺀 소금으로 절이면 배추 맛이 달달하고 부드럽다.


소금은 단순히 짠맛을 내는 조미료가 아니라 식재료의 수명을 늘린다. 염분은 식재료 속의 수분을 끌어내 부패균이 자라지 못하게 막는다. 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소금이 스며들어 미세한 삼투압의 균형을 만든다. 덕분에 배추는 쉽게 물러지지 않고 오히려 단맛이 배어 나온다. 염장은 이렇게 부패를 늦추는 동시에 새로운 맛을 길러내는 일이다.


배추는 꼬박 하루를 절인다. 소금 농도를 높게 해서 절이면 물러지기 쉬우니 농도를 낮추는 대신 시간을 오래 둔다. 절이는 일은 기다림의 시간이다. 소금이 스며들고 수분이 빠져나오기를 조급히 재촉할 수 없다. 천천히 간이 배어들어야 배추는 속살이 무르지 않고 깊은 맛을 낸다. 급히 간을 맞추려 하면 짜지거나 써지는데 이는 어쩌면 사람의 마음과 같을 것 같다. 염장은 음식을 오래 두고 먹기 위한 기술이지만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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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지나 절인 배추를 꺼내면 싱싱하던 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여러 번 씻어 물빠짐 좋은 소쿠리 등에 배추를 꺼내 놓고 반나절을 둔다. 그 사이 김장 속을 준비한다. 찹쌀 풀을 쑤어 식혀 놓고 무채를 썰고 들어갈 채소를 다진다. 각종 젓갈을 넣어 간을 맞추어 버무리면 김장 속이 완성된다. 김장을 하는 과정 중 가장 고된 순간이라고 하는데 이때 힘 좋은 사람이 버무리는 일을 맡는 게 좋다.


김치 속이 완성되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배추에 양념을 넣는다. 김장은 추운 겨울 내내 먹을 반찬을 해결하고 다음 해 여름이 올 때까지 가족의 먹거리 걱정을 덜어준다. 김장은 단순히 저장의 의미를 지니는 것 같지만 힘들어도 온 가족이 한데 모여 치르는 축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 소금이다.


태평염전 천일염 소금.jpg 태평염전의 다양한 소금 제품들


염장은 그렇게 시간을 저장하는 기술이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소금으로 계절을 묶었다. 봄에 거둔 나물을 여름까지 가을의 배추를 겨울 내내 먹을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장아찌, 젓갈 등의 염장 음식은 모두 인내의 결과였다. 하지만 짠맛 속에 스며 있는 것은 단지 보존의 기술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견디려는 삶의 지혜였다.


소금의 힘, 맛의 균형


김장을 마치면 예전에는 땅을 파고 독을 묻은 후 김치를 보관했다. 이제는 김치 냉장고가 그 일을 대신한다. 신선도를 유지할 뿐 아니라 맛의 정점을 오래 유지시킨다. 더 오래 시간이 흐르면 김장은 또 어떻게 변화될까. 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김장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고 한 해의 끝을 마무리하는 음식이 김장과 소금이라는 것은 잊지 않을 것 같다.


소금은 염장 음식의 바탕이다.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남은 결정은 단순한 미네랄 덩어리가 아니다. 그 안에는 자연의 기운이 남아 있다. 소금은 삼투압의 힘으로 식재료 속의 수분을 끌어내 부패를 막고, 동시에 수분이 빠져나간 자리로 스며들어 새로운 맛의 층을 만든다. 이때 단순히 짠맛만 남는 것이 아니라, 식재료 고유의 맛을 살려낸다. 생선을 절이면 살이 단단해지고 바다의 향이 짙어진다. 채소를 절이면 풋내가 사라지고 단맛이 돈다. 염장은 부패를 막는 과학이며 맛을 향상시키는 기술이다. 단지 혀를 자극하는 맛이 아니라 맛을 오래 머물게 하는 힘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소금으로 맛을 내고 소금으로 맛을 지킨다. 그러나 소금의 진짜 힘은 지나친 것과 모자람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에 있다. 너무 짜면 버텨내기 어렵고 너무 싱거우면 금세 맛이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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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그렇다. 적당한 간이 배야 오래 간다. 소금은 우리에게 음식을 오래 두는 방법뿐 아니라, 시간을 견디는 법, 마음 간을 맞추는 법을 가르쳐준다. 바닷물에서 온 한 줌의 흰 결정이 세월을 견디는 법을 가르쳐 주는 셈이다. 기다림과 절제, 시간 속에서 삶을 익혀가는 맛의 방식이 있음을.




※ 사진 자료


- AI 제작 및 태평염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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