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나 작가
고려가 처음으로 소금전매제를 도입한 이후 조선도 이를 계승했다. 조선에서도 주로 자염으로 소금을 만들었는데, 세종실록에 이 기록이 있다. 세종 때는 의염색(義鹽色)이라는 기관을 설치해 소금 생산을 늘릴 방법을 찾았다. 의염색은 소금을 만드는데 필요한 노동력, 필요한 시간, 바닷물을 가열할 때 쓰는 철분, 토분, 노동력, 작업 시간 등을 비교했다.
강원도 삼척, 경기도 남양, 황해도 웅진, 경상도 동래, 충청도 태안, 전라도 고흥지역을 비교했다. 예조 참의 이선제는 세종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소금은 천지간이 없는 곳이 없으나 (중략), 가마솥에서 바닷물을 달여 하루 밤낮을 지내면 하얗게 나오는 것이 동해의 소금이고, 진흙 솥에서도 하루에 두 번 달여 짜게 만든 소금이 서남의 소금입니다. 서남쪽의 소금이 노역이 헐하고, 수익은 갑절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2년 앞선, 세종 27년 집현전의 직제학인 이계전은 세종에게 상서를 올렸다. “동해는 바닷물을 끓이니 조수를 취하는 괴로움이 없지만, 남해와 서해는 상현, 하현의 조수가 물러갈 때를 기다려 하루 세 차례나 소에게 멍에를 지게 하여 조수를 취하니 그 괴로움이 밭 다루기보다 배가 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동해는 조수간만의 차가 별로 없으니 해수를 바로 끓여버리는 자염법을 썼는데, 서해는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자연갯벌을 활용하되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에 맞춰 갯벌의 흙에 바닷물이 들어오면 그 물을 걸러내어 소금을 끓이는 방식이라는 얘기다. 이 두가지 소금 제조법을 비교해보면 동해안 방식은 생산량이 적고, 연료와 노동력도 많이 든다.
서해안 방식은 노동은 고되지만 연료가 동해안보다는 적게 들지만 일단 생산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동해안 방식은 해수직자제 제염법(海水直煮製鹽法)이라 하고 서해안 방식은 염전식 제염법이라 하는데 이 앞에 제방이 없다는 말을 붙여 무제염전(無堤鹽田)식 제염법이라고도 한다.
이 제염법이 지금의 토판천일염 생산의 초기 단계라 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때 상현과 하현 때 바닷물이 밀려 나가면 이 사이에 3일 동안 햇볕으로 바닷물을 잔뜩 머금은 갯벌의 흙을 말려서 소금물을 만들어 달인다. 이 방식에서 한단계 발전한 것이 바닷물이 들고 나는 것을 조절할 수 있는 제방을 쌓는 유제염전(有堤鹽田)식 제염법이다.
제방이 있는 현대식 유제염전의 최초는 대한제국 시기 인천 주안에 천일제염시험장이라는 게 학계의 의견이다. 세종 때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인천은 자연도, 용유도, 삼목도, 사탄도에서 소금을 생산했다. 이때는 모두 자염법으로 생산했다. 1907년 일제는 인천 주안과 부산에 천일염을 시험하는 염전을 만든다. 그 다음해엔 1908년엔 탁지부에서 발간한 <한국염업조사보고서>를 발간했는데 일제가 어지간히 천일염 생산에 관심이 있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일제는 대량의 소금을 얻을 수 있는 천일염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일제는 주안에 염전을 설치하자마자 시찰에 나섰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 22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명일에 총리대신 이완용, 농상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탁지대신 고영희 사대신이 인천 주안리에 나가서 소금 굽는 마당을 시찰한다더라.’ 주안 염전은 1908년 무려 78톤의 천일염을 생산해 조선총독부에서 본격적으로 염전조성에 나섰다. 가까이에 인천항과 인천역이 있으니 물자이동에 용이하다.
당시 부천에 남동염전을, 시흥에는 군자염전을, 인천 소래와 황해도 연백까지 염전을 만들었다. 주안염전은 1911년 천일염전으로 완성되었다. 1933년 인천지역에서 나는 소금이 국내 생산량의 50%를 차지했다. 황해도, 평안남북도에도 대규모 염전을 조성했다. 일제는 인천지역 소금과 곡물 수탈에 쓰기 위해 수인선 협궤열차도 운영했다. 천일염의 생산량이 증대되자 자염생산은 점차 사라졌다. 수탈도 극심했고 전통적 방식을 고수하기 어려워졌다. 1941년부터 전시체제에 들어간 일제는 전통방식인 자염과 공업용 소금까지 모두 통제하며 민간의 소금 거래가 금지되었다.
일제가 천일염전에 집중하고 소금을 통제하면서 국내 소금은 계속 부족해졌다. 소금 한 가마와 쌀 한 가마를 교환할 정도가 되었고, 전통 자염업은 쇠퇴했으며, 염전 노동자는 제대로 삯을 받지 못했다. 광복 이전까지 개발된 염전은 북한에 집중되어 있었다. 광복 직후인 1947년에는 수입소금을 들여와 특정일에 유료로 배급할 정도로 소금 구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전쟁과 분단 이후 황해도의 연백염전도 북한 땅이 되자, 남한 내 소금부족이 심각해졌다.
조선시대부터 소금생산에 적합한 지역으로 인정받은 서해안이 다시 소금의 산지가 된 것은 광복 직후다. 신안군 비금면 수림마을에 살던 손봉훈 선생과 그의 조카 박삼만. 이 두 사람이 대한민국 천일염의 개척자로 꼽힌다. 손봉훈 선생은 평양 일대에서 천일염전 기술을 익힌 뒤 1944년 고향인 비금도로 돌아온다. 그는 갯벌을 막고 척박한 땅에 염전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해방 직후 평안도 귀성염전에서 돌아온 조카 박삼만이 고향으로 돌아오자 의기투합했다. 이들이 시작한 곳은 예전의 화염터, 즉 자염을 만들던 곳이었다.
두 사람은 마을 청년들을 모아 7인조를 구성하고, 1946년 비금도에 구림1호 염전을 개척하는데 성공한다. 박삼만은 최초의 천일염 생산자로 기록되었다. 1호 염전은 시조염전으로 부른다. 이때 마을 주민 30명이 모여 구림1호 천일제염조합을 조성한다. 이후 호남시조염전을 만들고 구림2호, 지당1호 염전을 만들면서 1호 염전의 성공에 이어 두 사람은 지역 주민들과 함께 염전을 확장하기로 하고 대동염전조합을 만든다. 초대 조합원은 450명이었다.
해방 이후 소금이 부족했던 정부는 민간 주도의 천일염전 개발을 권장했다. 이 관리는 염업협회를 만들어 관리했다. 비금도의 성공은 대동염전으로 발전했고, 이 대동염전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 천일염제조허가신청을 완료하고 대동천일제염개발조합(大東天日製鹽開發組合)을 출범시킨다. 당시 천일염 제조허가신청서에는 사업계획설명서가 다음과 같이 첨부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 국민의 생활상 가장 중요한 물질인 식염(食鹽)의 증산(增産)은 무엇보다도 긴급한 과제인데, 과거 조선의 재래식 제염 방식은 대단히 유치하며, 막대한 노력과 많은 연료를 요구하므로, 조합원 일동은 생산과 경영방식이 이상적인 천일염전(天日鹽田)을 구축하여 최소경비와 노력, 최단 시간에 최대 생산실적을 만들어서 식염사정 타파에 미력하나마 봉사하고자 한다.’
광복 이후 정부의 전매국에서는 인천 주안염전에 제염기술원양성소를 설치했다. 이 자격이 전문대학 졸업자 이상이었다. 전매국 시험에 통과해야 교육생이 될 수 있어 요건이 까다로웠다. 비금도의 염전 성공에 힘입어 1951년(추정)경, ‘비금제염기술원양성소’가 설치된다.
한국전쟁 이후 신안지역에서는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며 천일염전을 조성했다. 목포전매청에서 기술보급과 교육을 도왔고 천일염 생산에 대한 교본도 만들었다. 여기서 수련한 기술원들은 이후 자신의 염전을 꾸리며 신안군의 각 섬으로 확장해 나갔다. 자은도와 지도, 증도에서도 천일염전을 일구는 기술자들이 생겨났다. 불과 3년 만에 비금도의 대동염전은 성공적인 남한 최대 천일염전 대표지가 되었다. 지역 주민들은 “오백 세대 부락에서 매일 한 사람씩 나와 피땀을 흘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신안에서 시작한 민간의 천일염전 개발 사업은 공동체 문화에 뿌리를 두고 섬 주민들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었다. 이후 정부는 난민구호와 경제기반 구축을 위해 전남지역에 천일염전을 조성할 계획을 세울 계기가 되기도 했다.
비금도 염전 성공의 영향으로 민간에서는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단일염전인 증도의 태평염전이 탄생하게 된다. 태평염전은 1953년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 전증조와 후증도 사이 갯벌에 둑을 쌓아 대규모의 천일염전으로 만든 것이다. 그야말로 사람 몸에서 소금을 쏟아내며 일궈낸 놀라운 소금밭이다.
※ 참고/사진 자료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 유승훈 / 푸른역사
19-20세기 도서지역 간척을 통해 본 공유와 분배 / 김경옥 (2020)
광복이후 비금도 대동염전 개발과정과 사회적 가치 / 최성환 (2018)
비금도 천일염전 개발과정과 사회적 확산 / 최성환 (2012)
천일염산업의 현황과 정책과제 / 한재환, 최병옥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2010)
천일염전 개발과정을 통해 본 섬사람들의 이주 현상과 공동체적 특징 / 최성환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