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증도의 첫 번째 천일염전

이하나 작가

비금도에서 시작한 천일염전은 손봉훈, 박삼만 등 걸출한 인물의 이야기를 남겼다. 비금도에서 조합을 만든 민간중심의 대동염전 개발에는 명일담이 참가했는데,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북한지역에서 천일염전을 만들었던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총독부는 평안남도에 천일염전을 개발하는데 집중했고, 이때 일했던 이들이 남쪽으로 흘러들어온다.


신안은 예나 지금이나 천일염전의 중심지다. 비금도는 평안도 지역에서 일했던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며 염전이 만들어졌고 자생적 커뮤니티를 통해 산업화되었다. 비금도의 성공을 목도한 주민들은 앞다퉈 염전을 만들기 시작한다. 1947년 병풍도에 이개동 씨가, 1948년 증도에 이행용 씨가 염전 개발에 성공한다. 이때 군산 출신 두홍조(1905~1984) 씨를 영입해 염전축조와 소금 채굴 기술을 배운다. 두홍조 씨는 황해도 연백에서 염전일을 하다가 신안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증도의 광암마을 김관섭 씨, 지도읍 태천 조씨도 염전을 개발했다.



브런치_00.jpg <신안문화_22호/2012년 발행>


한국전쟁 직후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에서는 각자의 사정에 따라 남북으로 이동했다. 1951년 정부가 난민구호를 목적으로 새로 조성하는 간척지에 대규모 염전을 개발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제일 먼저 간척지를 조성한 곳은 전남 무안이었다.


1953년 전쟁이 끝나면서 남한 사회에 몰려든 대규모 피난민을 수용하고 이들의 정착을 도울 필요가 있었다. 정부는 북한 지역에서 온 피난민을 정착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간척사업과 염전개발을 추진했다. 피난민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 개간사업과 간척사업에 투입되었다. 무안, 영암, 광양, 진도, 무안등에서는 간척지 매립이 있었고, 해남, 영암, 영광 등에서는 염전개발이 있었다.


증도는 이행용 씨의 주도로 전증도와 후증도 사이 갯벌에 둑을 쌓아 염전을 만들었다. 현재 개인 염전이 가장 많이 분포해 있는 신의도도 마찬가지였다. 신의도는 원래 상태도와 하태도로 구분되어 있던 곳인데 광복 이후 계속 간척사업을 벌여 지금의 신의도가 되었다. 신안지역에 자리잡은 피난민들이 만든 염전은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들의 노동으로 신안의 지도가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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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갯벌을 개척해 조성한 염전은 개인의 생계유지와 생활기반을 위한 것뿐 아니라 지역 내 소득을 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염전은 섬 사람들이 땀 흘려 일군 공동의 자산이다. 섬 사람들은 “소금값과 나락값이 같다”는 말을 많이 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소금값이 더 헐해졌다. 증도에서 처음 염전을 개척한 이행용 씨의 기록에는 당시의 소금값이 언급돼 있다. <신안문화>에 실린 이행용 씨의 자전기록에는 “소금이 귀하여 아주 비싸서 쌀과 맞바꿀 정도”였다고 쓰여 있다.


이행용 씨는 비금도에서 천일염을 생산한 얘기를 듣고 염전을 해볼 결심을 한다. 이 무렵 형님이 일본어로 된 <천일염 개요>를 구해주었다. <천일염 개요>에는 “물살이 세거나 자주 오지 않고, 큰 산 밑이 아니며, 주변 바다가 깨끗해야 한다”는 내용이 당시의 언어로 기술돼 있었다. 이행용 씨는 장고리 이남용 씨 논 아래가 적당하다 보고 제방을 막기로 했다.


앞서 언급한 두홍조 씨가 와서 염전 축조를 도왔다. 공사는 5개월 정도 걸렸고 공사비용은 소 한 마리를 팔아 충당했다. 염전을 조성한 후 염수를 가두었다. 이행용 씨가 매일 함수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마을 사람들이 맨땅에서 소금을 낸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 하는 짓이라고 혀를 찼다. 어머니는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어느 날 두홍조 씨가 “오늘 소금이 나올터이니 음식을 장만하라”고 했다. 이행용 씨는 근처 언덕에서 염전을 바라보았다. 결정지의 일부가 흐리게 눈이 온 것처럼 꽃이 피었다.


염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소금이 만들어지는 것을 “소금이 온다”고 표현한다. 소금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다로부터 하늘의 힘을 빌려 자연스럽게 “온다”는 것이다. 처음 증도에 소금이 온 날, 이들은 돼지를 잡고 음식을 장만해 마을잔치를 벌였다. 1948년 신안에서 천일염을 생산하는 곳은 지도와 임자도의 이개동 씨와 증도의 이행용 씨 둘뿐이었다. 당시 소금값은 대초리 앞 논 30두락을 살 돈이었고, 3년동안 2개 판에서 생산한 소금으로 보리 700가마니를 살 수 있었다.


이행용 씨는 염전에서 돈을 벌러 도시로 나가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따라가지 않겠다고 해서 모친곁에 남기로 하였다. 이행용 씨는 이후 대초리와 우전리 사이의 제방을 막아 염전을 더 만들었다.


4편_02.jpg 참고자료


1950년, 염전에서 번 돈으로 보리 200가마니를 구매해 자금을 조달할 생각이었는데 미국산 보리가 들어오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제방공사를 하기로 했으니 포기할 순 없어 제양섬에서 작은 배로 돌을 날라 제방둑을 쌓았다. 돌을 나르는 데만 수 개월이 걸렸다. 주민 200여 명이 매일 제방공사를 함께 한 덕에 3개월 만에 950m의 제방을 완공했다. 김민수라는 기술자가 염전 설계와 내부 공사를 맡았고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과 지역 주민이 한데 어울려 염전을 일궜다.


증도에 첫 염전이 생긴 이후 태평염전은 1953년부터 축조되었다. 태평염전으로 증도의 지도가 바뀌었다. 태평염전이 바다를 메꾸면서 증도의 총 면적은 이전보다 22% 늘어났다. 인근 비금도 역시 10여 개의 큰 섬이었던 공간이 염전으로 메워지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여럿으로 분리되었던 섬의 규모가 커지고 염전개발로 먹거리가 생기자 증도에는 피난민과 원주민이 어울려 새로운 공동체로 변화했다.


1987년 기록에 따르면 태평염전 1공구 74명, 2공구 64명, 3공구 55명의 구성원이 등재되어 있다. 이들 중 108명이 외지인이었는데, 강원도, 경기도, 전북, 충남, 경남 마산 등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염전에서 일했다.


신안군 내의 도초도는 1953년 도초도 의회의 의결을 거쳐 빈 땅에 염전을 개발했다. 도초면에서 전매청으로부터 염전축조자금을 빌려 염전을 조성했다. 여기서 벌어들인 돈은 목포경찰서 도초지서의 민폐근절 사업비로 쓰기도 했고, 도초고등공민학교의 재원에 사용되기도 했다. 도초도 염전은 이 학교에서 관리하다가 1977년 공립으로 전환하면서 전라남도 교육위원회로 기부 체납되었다.


FB_IMG_1553074730575.jpg 현재의 태평염전


요컨대 신안의 염전은 전쟁과 피난으로 터를 잃은 사람들을 품고 지역의 재원이 되었다. 염전을 만들며 떨어져 있던 섬이 하나로 붙으며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졌고,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과 섬 토박이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다. 소금은 변화무쌍한 자연과 사람의 조화로 만들어진다. 소금이 오길 기다리는 공동체의 힘이 바탕이었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참고문헌/사진 자료


<비금도 천일염전 개발과정과 사회적 확산> 최성환, 2012

<19세기~20세기 간척으로 인한 섬의 토지이용 실태 : 전증도, 후증도 사례> 김경옥, 2023

<19세기~20세기 도서지역 간척을 통해 본 공유와 분배> 김경옥, 2021

<19~20세기 비금도 간척지의 조성과 이용 실태> 김경옥, 2016

<20세기 비금도 가산리와 공간변화와 간척지의 이용실태> (김경옥, 2017)

<1945~1948년 미군정의 소금 수급정책과 군자, 소래 염전> 박지현, 2015

<광복이후 비금도 대동염전 개발과정과 사회적 가치> 최성환, 2016

<근현대 신안군 도초도의 간척과 그 영향> 이광록, 2016

<천일염산업의 현황과 정책과제> 한재환, 최병옥, 2010

<천일염전 개발과정을 통해 본 섬사람들의 이주 현상과 공동체적 특징> 최성환, 2007

<신안문화 22호 / 신안문화원> 이행용, 2012

<[CEO] 손일선 태평염전 회장 - 염전의 아들 ‘소금왕’ 꿈꾸다 – 이코노미스트> 오상민기자, 2013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장보고대상’에 손일선 태평염전 회장 – 한겨레신문> 이정하기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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