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나 작가
이행용 씨가 증도에서 최초로 개간한 염전은 우전리와 대초리 사이의 염전으로 현재의 태평염전 위치는 아니다. 화도와 증도면 사이로 보인다. 조선시대 고지도를 살펴보면 시루 甑(증)자를 써서 선증도 후증도로 나뉘어져 있었다. 시루에 물을 부으면 바로 빠져나가듯이 물이 귀하다 해서 ‘시루섬’이라 불렀다. 따라서 선증도는 ‘앞시리’, 후증도는 ‘뒷시리’라 불렀다. 증도는 모래와 갯벌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런 환경이 물을 머금기 어렵다고 한다.
조선시대 행정구획도와 일제강점기 지도에도 섬은 나뉘어져 있고, 증도 북동쪽에 있는 사옥도와 함께 사옥면으로 편입되어 있다. 조선 지도와 일제강점기 지도를 기반해서 보면 현재 증도의 한 가운데를 가르고 있는 태평염전이 선증도와 후증도를 연결시켰다는 것이 아닌지 유추해볼만 하다. 태평염전은 증도의 한 가운데에 네모반듯하게 펼쳐져 있다.
조선시대부터 신안군에서는 간척사업이 있었다. 암태도는 간척지 인근에 마을이 만들어졌고, 비금도와 도초도에도 간척사업이 있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사이 여러 곳에서 간척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때 증도는 배를 만드는 나무를 기르기도 했고, 소를 방목하는 목장이 있었다. 조선시대 기록에 따르면 증도는 전증도, 후증도, 우전도 등 세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초리가 전증도이고 중동리와 방축리가 후증도이다. 중동리 부근에 논과 밭을 가꿀 수 있는 땅이 있었고 북쪽에는 고기를 잡거나 소금을 만들기 용이해 후증도에 인구가 더 많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증도에 무제염전, 즉 방조제가 없는 자염생산 염전이 있었다. 불로 물을 끓여 소금을 채취하는 방식의 염전이 있었다는 얘기다. 증도는 1905년에도 신안군의 다른 섬보다 인구가 많은 편이었다. 고기잡이, 논농사, 밭농사, 소금 생산 등이 주 소득원이었다.
1950년 전에는 증도 간척지 중 79.5% 정도가 논밭이었고, 19.5%가 염전이었다. 그러다 1950년대 간척지가 급증하면서 염전이 32.37%까지 늘어났다. 1953년 증도 간척사업을 주도한 것은 척방염업주식회사다. 이 회사는 이승만 정부 시절 부통령을 지낸 이기붕 씨가 소유주였다고 알려졌으나 정확한 문건은 찾기 어렵다.
1955년 9월 27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민제 염전이 전남 무안군 지도면에 개척되었고, 수천 명의 노동자와 1억 환에 달하는 공사비를 투자했으며 연간 4만 톤에 달하는 천일염이 생산될 예정’이라고 적혀있다. 이 회사는 불법자금 대출과 섬의 공유공간을 사유화 한 것, 염전 노동자의 임금을 체불한 것이 드러나 문제가 되었다. 척방산업은 산업은행에서 공사 대금을 대출받았는데, 당시 담보물이 바닷물과 갯벌이었다.
척방염업은 1953년부터 1955년까지 공사를 진행했으나 1959년에서야 토지대장에 이름을 올린다. 이후 염전사업은 대평산업이 맡게 되는데 이 회사가 1963년 폐업한다. 1975년, 마을 주민이 폐업한 염전부지에서 경작을 시도했다가 척방염업으로부터 업무방해로 고소당한 기록이 있다. 당시 법원은 농민이 오랫동안 경작을 해왔고,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는 과정 중에 경작을 하는 농민에게 제대로 설명하거나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업무방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례가 등장한다. 1970년대의 소유주였던 태평산업은 문건에 따라 대평산업으로 기재되기도 하는데, 한자나 한글 모두 점 하나 차이라 오기가 있었던 것 같다.
1970년대 한국의 소금은 다수 경기 인천지역인 소래염전에서 30%이상을 생산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서야 신안군 증도와 비금도의 소금 생산량이 증가했다. 경기 인천 지역이 대규모 개발로 염전이 쇠퇴하면서 전라도 신안지역의 소금생산 비중이 높아진다. 1990년대 전국 소금 생산량의 40%가 전남지역이 차지했다. 현재는 전국의 허가된 염전 중에 면적으로는 52%를 차지하고 생산량은 2010년 87.9%까지 치솟았다.
현재의 태평염전은 1985년 삼선개발주식회사의 손말철 회장이 인수하면서 지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140만 평의 태평염전은 1985년 태평염전으로 거듭났다. 1970~80년대는 소금 수확이 들쭉날쭉해 국가에서 오히려 정제염을 장려하던 때다. 1985년부터 제대로 된 염전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가 체결되면서 소금수입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국내 소금값이 폭락했고 염전도 하나둘 폐쇄되었다. 태평염전도 약 43만 평의 염전을 폐쇄했다. 경영을 물려받은 손일선 회장은 2004년 목포대학교 함경식 교수가 건넨 <게랑드 이야기>를 읽고 염전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한다.
2006년 태평염전은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고 국제 HACCP 인증을 받으며 주식회사 태평소금의 제1공장과 제2공장을 염전 근처에 설립하였고, 2015년 제3공장도 준공했다. 신안군의 증도가 아시아 최초 슬로우시티로 지정되고, 태평염전 갯벌이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 지역으로 지정되는 등 지역 발전을 함께 이끌었다. 2011년에는 태평염전 일대가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었다.
태평염전 주변에는 소금박물관, 염생식물원, 힐링 캠프와 예술가 레지던시 등 자연과 예술 소금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염전의 섬 증도가 예술과 문화 단지로 거듭나는 것이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는 모토로 느리고 조용한 섬 증도. 단일규모 국내 최대 염전 생태 그랜드 슬램 달성의 태평염전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 참고문헌/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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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 비금도 간척지의 조성과 이용 실태> 김경옥, 2016
<20세기 비금도 가산리와 공간변화와 간척지의 이용실태> (김경옥,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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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이후 비금도 대동염전 개발과정과 사회적 가치> 최성환,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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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염산업의 현황과 정책과제> 한재환, 최병옥, 2010
<천일염전 개발과정을 통해 본 섬사람들의 이주 현상과 공동체적 특징> 최성환, 2007
<신안문화 22호 / 신안문화원> 이행용, 2012
<[CEO] 손일선 태평염전 회장 - 염전의 아들 ‘소금왕’ 꿈꾸다 – 이코노미스트> 오상민기자, 2013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장보고대상’에 손일선 태평염전 회장 – 한겨레신문> 이정하기자, 2018
<태평염전 위성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