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 왜 이러시나~
기도 안 차는 늙다리 오빠들
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
오빠한테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 있나?!
“어~ 오빠! 무슨 일 있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유?”
“뭐 하냐?”
“아범 늦게 와서 이제 식사 차려주고 먹는 거 구경하고 앉아 있는데?!”
“어 늦었구나?! 그~ CS 하고 DI이가 너랑 통화하고 싶단다.
너한테 전화 좀 해 보라고 성화야~”
“참내 그 오빠들이 왜?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몰라~ 통화해 봐~”
CS와 DI는 오빠의 어릴 적 동네 친구이고 나도 잘 아는 오빠들이다.
어릴 때부터 한 동네 살며 친하게 지냈고 모두 결혼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했어도 아직까지 만나며 잘 지내는 오빠의 좋은 **친구들이다.
가끔 오빠를 통해 소식을 듣기는 했어도 일부러 전화해서까지 소식을 알고 싶지는 않은 터라 의아했다.
“여보세요~”
“어~ SH야~ 나 DI오빠야~ 그냥~, 너 옛날에 진짜 이쁘고 귀여웠었는데~”
“으이구~ 젊을 때 안 이쁜 사람이 어딨 다고~ 이제 나이가 몇 이유? 한 잔들 하시는구만요?”
“아냐~ 넌 특별히 더 이뻤어~ 갑자기 옛날 얘기하다가 생각나서 통화하게 해 달라했어~
너네 오빠만 아니었으면 내가 프러포즈했을 텐데 말이야~”
“헐~ 이 영감님 뭐라셔?! -기도 안 찼다. 술주정인 겐가?! 그냥 웃고 말자-”
“여하튼 잘 살고 있지? 참! 그 눔(말을 살짝 흘림. 좀 실례라고 생각은 된 모양이지?! 참내!! 어디다 대고 이 눔 저 눔이야!!), 니 남편(남편 아니고 ‘여보’거든!!! '남편은 남의 편'이라 싫거든요!!)도 잘 있고?"
"잘 있지~ 그럼!! 아주 잘 살고 있습니다요."
-예전에 한 번 만나서 여보가 테니스 한 판 레슨시켜 줘서 얼굴만 앎-
'참내! 근데 이 오빠가 뭐라는 거야?'
또 다른 오빠가 전화를 가로챘다.
“SH야~ 나 CS오빠다~ 잘 사냐?”
“잘 살지~ 그럼! 오빠도 잘 살지?! 다들 건강하게 잘 사십시다~
술 고만 자시고 어이 들 들어가셔~”
뭐라 뭐라 계속 말을 이어가려 했으나 STOP!!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
언제 적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아니 자기네 들이 내 조건에 맞기나 하는 줄 아는 모양이지?!
얻다 대고 프러포즈 어쩌고 하는 게야?! 참내!!
아주 그냥~, 술을 먹어도 조용히 자시기나 할 것이지~
언제 만나기만 해 봐라 아주 내가 주리를 틀 것이야!!
오빠들이 내 조건에 안 맞는 것 몇 가지를 읊어 드리리다. 크크크크
물론 술 먹고 괜히 하는 소리인 줄 알지만 말 나온 김에 한 마디 해 드리리다.
내 결혼 조건은
첫째, 당신들은 이미 시골 출신이 아니지 말입니다.
이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 고기들아!!
-이 얘기는 부산 사촌들이 우리에게 했던 말인 것 같다. 아마 서울 사람들의 말이 자기네랑 다르게 너무 생뚱 맞고 새초롬하고 간드러진다고 놀려먹을 때 했던 말인 듯하다.-
이 말이 아직도 기억나다니~ 하하
우리 부모님은 월남하신 분들이어서 친가 쪽 친척은 막내 작은아버지 한 분뿐이다.
5남매 중에 두 분만 내려오셨다고 했다. 아버지랑 연세 차이가 10살인가 났었다.
부산에 사셨는데 어렸을 때는 방학 때 가끔, 여름에는 부산으로 겨울에는 서울로 놀러
다니기도 했었지만 중학생이 된 후로는 서로 바쁘니 왕래도 못하고 큰 일 있을 때 한 번씩 오가거나, 명절 때 작은 아버지만 양손 가득 선물 박스를 들고 오셨다. 작은아버지께서 엄마 음식을 좋아하셔서 가실 때는 김치도, 명절 음식도 잔뜩 싸서 보내드렸던 기억이 난다.
월남하며 헤어진 부모님 제사에 참석하시려고 오셨던 것 같다.
외가 쪽은 이모들이 네 분, 엄마까지 다섯 자매가 있었고 외조부모님까지, 또 집안일 도와주는 분들까지 싹 다 트럭을 사서 타고 내려오셨다고 했다. 건설업을 하셨던 외할아버지께서 돈을 많이 벌었었는데 부르주아라서 이북에서 못 살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북에 외삼촌 한 분, 이모 한 분이 더 계신데 같이 못 내려왔다고 이모들이 마음 아파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래도 외가댁은 한 동네에서 가까이 살았고 이모들도 결혼한 후 다 같은 동네에 살아서 자주 만나긴 했지만 명절 땐 당신들 시집에 가야 했으니 우리 집은 명절이 너무 심심하고 썰렁했다.
그래도 어릴 땐 외가댁에 모여 명절을 지내기도 했었고 가끔 모여 어른들이 쌩쑈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며 재미있게 지내기도 했지만 커서는 자주 못 갔었던 것 같다.
여하튼 그래서 나는 명절 때, 시골에 가고 싶어서 시골 출신 남자를 첫 번째 결혼 조건으로 삼았었었다.
그런데 살아 보니 내 감성과 여보 감성이 일치한 것은 절대 아니다.
살아온 지역 문화가 달랐고, 자라온 성장 문화가 달랐으니 것도 좀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너~무 시골 문화에 최적화된 여보다.
그래도 시골 감성은 조금은 있는, 이해 폭이 조금 더 넓고, 성격 좋은 내~가, 내가 맞추며 살아갈 수밖에~ 으으으으~
둘째, 형제자매가 많은 사람이다.
텔레비전이나 주위에 보면 친척이 모여 같이 놀러 다니기도 하고 재미나게 지내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다. 그러다가 말썽도 생기긴 하지만.
우리 외갓집 이모들 가족 하고도 그렇게 재미있게 지냈으니 나도 형제자매 많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다.
근데 살아보니 우애가 좋아야 왕래도 하고 놀러도 다니지, 우애가 좋지 않거나 성격들이 너무 차가우면 그것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주 우애가 없는 것은 아니고 살갑지도 않고 대분대분한 성격들이라 내 시집식구들은 별로 안 친하다. 제일 윗분의 성정에 따라 그 가족의 분위기가 결정되지 싶다. 동생들을 잘 컨트롤할 수 있어야 '친척 모임'도 이루어지겠고.
매우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이젠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뭐 굳이?!' 하며 각자 자기 식구나 챙기며 산다.
그리고 챙기면 같이 챙겨야지 나만 챙기는 것은 오래 못 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은 give & take가 기본이 되어야 마음도 편하지 일방적인 건 그 마음을 지치게 만든다.
받을 줄만 아는 ㅇㅇㅇ는 별로다.
그래도 시누이들하고는 잘 지낸다.
멀리 살아서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연락도 가끔 하며 왕수다도 떨며 지금까지 친하게 지낸다.
서로 궁금해하고 같이 여행 가자고 계획도 세웠었는데 실천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관계 유지는 잘 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시부모님은 따뜻한 분이어서 그 맛으로 결혼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여보한테 '어머니 보고 결혼하는 거'라고 늘 말했었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의 성정을 더 알게 되었지만 뭐, 그래도 난 어머니를 좋아했었고, 사랑했었다.
셋째 조건은 뭐였더라~ 하도 오래돼서 생각도 안 나네.
넷째, 전문직을 가진 사람이다.
왠지 멋있어 보였고, 오래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노년의 삶이 조금은 풍요롭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오빠들도 다 대기업에 다니긴 했지만 나랑 안 맞아!!!
사실은 가정살림을 담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직장인이 더 편할 수도 있겠다는 것도 살면서 알게 되었지만 후회는 안 한다.
다섯째, 그래도 좀 깔끔한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생김생김이야 자기네들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럭저럭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좀 안 이뻐도 눈에 익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 말씀이 JH 이는 "어릴 때에도 소매가 깨끗했어." 그러셨다.
옛날 시골에서는 다들 어릴 적, 밖에서 놀 때 콧물이 나와도 소매에 쓱 닦아서 소매 끝이 시커멓게 뺀질뺀질하게 되었었다는데 어린 JH 이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고 하셨다. 깔끔한 성격이긴 한 모양이다.
또 여보는 우리 연애하던 시절, 하숙생임에도 참 깔끔하게 바지도 잘 다려서 입고 다녔어서 후줄근하지도 꾀죄죄하지 않았다. 절대 패셔너블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야 내가 잘 사서 맞춰 입히면 되는 것이니 별 문제는 아니었다.
딱 하나, 내가 결혼 조건으로 삼지 않은 것으로 많이 후회하는 것은 ‘믿음 생활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을 조건에 넣지 못한 일이다.
교회 교사로 찬양대로 봉사할 때, 집사님들이 결혼 조건도 구체적으로 잡아 놓고 기도해야 된다고 해서 나름 그렇게 하긴 했는데 이것을 빼먹어서 후회막급이다.
결혼 전 청년부에 데리고 갔었는데 그 분위기를 그렇게나 싫어하는 티를 내서 너무 속상했었다.
지하철 기다리며 말했었다.
"결혼 다시 생각해 보자~ 난 결혼해도 교회에 다닐 건데 자기가 그렇게 싫어하면 안 되잖아~" 그랬더니
"다니게 될지 어떻게 알아?!" 애절한 눈빛으로 하던 그 말에 또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넘어갔었다.
에효~
결혼 후, 아니나 달라! 혼자 다녔었고, 아이들 유아세례 받게 하려고 억지로 세례까지는 받게 했지만, 교회까지는 태워다 주고 자기는 밖에서 돌다가 데리러만 왔었다.
혼자 믿음 생활하기는 참 외롭고 슬프고 속상하다.
나중에는 아이들이 같이 해줘서 감사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음 한 편은 지금까지도 좋지 않다.
너무 강성인 남편은 어느 순간 팍 꺾일 수도 있다고 믿고 기도하며 기다린다.
이렇게 결혼 조건을 만들어서 기도 시작 했던 게 아마 한 40여 년쯤 전이었나 보다.
결혼하기 2~3년 전부터 기도를 시작했었던 것 같으니. 캬~ 오래도 되었네.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허락하신 것에 대해 책임을 다하며 살려고 인내와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애쓰며 산다.
이런 내 결혼조건들에 오빠들이 충족되는 건, 하나나 두 개 밖에 없을 겁니다요.
그러니 다신 그런 쓰잘대기 없는 말씀은 삼가시기 바랍니다요. 푸하하하하하
이렇게 나는 오빠들이 웃자고 한 말에 나 혼자 죽자고 덤빈다. 크크크크
오빠들이니 마구 까불어 대도 다 받아 줄거라 믿으며.
그래봐야 한 살 차이.
이제 다 같이 늙어 가는 처지인데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