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70℃ 인간

by 훈연

나는 늘 70℃ 인간이었다.


0℃도 아니고 100℃도 아닌,

늘 적당한 선을 지킨 미지근한 삶.




어렸을 때부터 나는 특별히 무엇에 집착하거나

깊이 빠지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오빠 부대가 되어

광적으로 매달린 적도 없었고, 잠을 안 잘 정도로

푹 빠지는 취미도 없었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취미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좋아하긴 했지만, 적당히.

딱 나만의 선이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이 밤을 새우고 새벽같이 일어나

굿즈를 사러 달려갈 때도 속으로 생각했다.


뭐 저렇게까지..

겪어본 적 없는 내게 그런 ‘뜨거움’은 낯설고 어색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열정을 인정하고 그럴 수 있다 생각은 하지만,

정확히는 모르겠는 그런 온도.

살면서 딱히 필요한 온도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친구들과 화제를 이어 나갈 수는 있지만,

함께 콘서트를 갈 만큼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


살면서 불편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딱히 고칠 필요도 못 느꼈다.

어쩌면 아직 뜨거워질 대상을

못 만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생각해 보면 나는 뭐든지 적당히 하는 것이 좋았다.

학창시절 공부도 정말 열심히 했지만,

딱히 1등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런 불타는 승부욕이나 경쟁심이 애초에 없었다.

그냥 적당히 잘하면 되는, 못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

딱 그 정도의 선.



좋아하는 캐릭터를 사서 모았고 아까워서

쓰지도 못했지만,

어느 매장에 가서도 살 수 있는

딱 그 정도만 샀다.

무엇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다.

재미를 붙여도 적당히 할 수 있는 만큼 연습했고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배드민턴, 수영, 기타, 캘리그래피..

이런 취미도 자발적으로 찾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친한 친구가 함께 하자고 하면


“그래볼까? 나도 관심은 있었어.“


그렇게 주변의 권유로 시작했다.

누군가는 정말 원하는, 딱 맞는 취미를

찾지 못해서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처음부터 불같은 열정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다.

타고나기를 그랬다.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게도 끝까지 내 모든 것을

불태우는 열정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떠올려보면 늘 그랬다.

시험공부를 하다가 목표를 못 채웠어도

“이쯤이면 됐다” 하고 멈췄고,

기타를 배우면서도 손끝이 아프면

며칠 쉬다 흐지부지 포기하곤했다.

끝까지 밀어붙이는 대신,

늘 적당한 선에서 접어버렸다.


나이가 들어 보니 주변에 성공한 사람들은

다들 열정이 넘쳤다.

한 두 가지는 뿌리를 뽑을 때까지 해보거나 좋아하는

그런 끓는점이 있었다.

100℃를 넘어서 그 이상도 쏟아내는,

그래서 기어이 무언가 성취해 내는 사람들을 보니

아쉬움과 박탈감이 남았다.

'나는 왜 뜨겁지 못했을까?'


그러다 문득 막 내린 커피의 뜨거움에

데었던 생각이 났다.

매장에서 갓 나온 한잔을 마셨을 때의 그 열기.

입안이 두툼해지는 듯 감각이 없어지는 그 온도.

나는 그 후로 먹기 좋은 온도를 위해

항상 용기의 뚜껑을 열어놓곤 했다.

어느 정도 식은 커피는 마시기 딱 좋았고

향도, 맛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뜨겁지 않은 것은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엔 뜨겁지 않아서 좋은 것도 많았다.

호호 불어 열기를 날려 줘야 먹기 좋듯이,

체온에 가까운 온도가 몸을 담그기 좋듯이.


커피가 식어가며 가장 맛있어지는 순간,

찻물이 70도일 때 가장 향이 진해지는 순간처럼,

내 삶은 언제나 ‘적당한 온도’에 머물러

있었던 건 아닐까?


제대로 끓지 않아

음식 맛의 절정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지는 몰라도,

누구도 데이지 않게

먹기 딱 좋은 온도로 음식을 내는 것처럼.

펄펄 끓는 열정, 기필코 해낸다는 승부욕은 없었지만,

그렇기에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배타심도 없었다.

누구와도 다양한 주제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자신마저 불태울 것 같은 사람들의 흥분과 분노도

식혀줄 수 있는 편한 친구가 되었다.

70℃ 인간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활활 불태워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취를

얻지 못했을지는 몰라도,

나는 내 삶의 속도를 잃지 않고

오래도록 꾸준히 걸어올 수 있었다.


삶에는 100도의 불꽃도 필요하지만,

70도의 따스함도 꼭 필요하니까.


내 삶이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하지 못해서,

미지근한 어정쩡함이 맘에 들지 않을때,

그래서 내가 너무 싫어질 때,

스스로에게 말해줘야 한다.


세상이 내게 차갑게 굴 때도

나는 항상 누구에게나 따뜻했고,

삶의 온도가 뜨겁지 않았을지언정

나는 항상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것을.

그러니, 내가 나를 좀 더 사랑해주는

따뜻함이,

적당한 온도가,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삶은 늘 100도로 끓어오를 필요는 없다.

70도의 따뜻함 속에서도 충분히 의미 있고,

충분히 아름답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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