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주 오래 기억될 순간

by 훈연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이지만 춥지 않은 날씨.

참하게 내리는 눈발이랄까?

요란하게 휘날리지 않고, 미끄러질 걱정도 없는

딱 적당한 눈이었다.




아빠뻘의 부장님은 회사 앞 토스트 가게에 가자고 하셨다. 내가 먼저 토스트가 먹고 싶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끼는 부하직원의 말이라 스치듯 흘려보내지 않으셨을 수도 있다.


“지금요? 눈이 내리는데?”
“박선생 바쁜 업무있으면 혼자가고.”
“아니에요! 좋아요. 같이 가요! 부장님.”


헐레벌떡 겉옷을 챙겨서 부장님과 사무실을 나섰다.

건물 밖은 안에서 보는 것과 달리 따뜻했고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눈의 정취에

세상은 좀 더 고요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사람들에게 나눠줄 토스트와

커피 몇잔을 주문하고 창밖을 보니,

'박선생~' 하고 부르는

따듯한 목소리가 기분 좋은 커피향과 함께

잔잔하게 퍼졌다.


“박선생 아니면 내가 누구랑 이렇게 나와서

커피를 사나?

눈도 오는데 귀찮아 하지 않고 나와줘서 고마워.”


폐끼치는 걸 싫어하시는 성격 탓에

업무면에서는 칼 같은 성격이시지만,

마음은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럽다.

나만 그걸 아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고,

왠지 모르는 뿌듯함도 생겼다.


“부장님이 먼저 말씀해주셔서 제가 이렇게

눈 구경도 하는걸요!

사무실 안에서 볼 때랑은 다르네요."


창밖은 차분 차분 눈이 날리고 고소한 커피 향은

그 시간을 더욱 느리게 흘러가게 해 주었다.

팅!

알맞게 구워진 토스트와 커피를 들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박선생,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
무거우면 나 주고."


몇 개 안되는 짐에도 슬리퍼를 신고 나온 내가

행여 미끄러질까 신경써주셨던 부장님.

차가운 인상과 달리 한없이 따뜻했던 분.


"이 정도는 괜찮아요. 부장님~
우리 이렇게 하고 가요!"


내가 먼저 부장님 팔을 살포시 잡고 팔짱을 낀다.

평소 회식 후 적당히 취하신 부장님을

종종 부축해 드린터라,

서로 낯설지 않은 그 온기와 거리가 편안하다.


햇볕은 따스하고, 눈은 꽃잎처럼 내린다.

한산한 거리는 부장님과 나, 둘만의 차지다.


"부장님, 지금 이 순간이 오래오래 기억날 것 같아요.
첫눈이 오는 날, 부장님과 이 시간에 토스트와 커피를 들고 가다니.."


"그러게, 박선생과 첫눈을 맞네.
나도 이 시간에 눈 맞으면서 걸을 줄은 몰랐어."


어린아이처럼 밝게 웃는 나를 보고

부장님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오른다.

아들밖에 없으신 부장님은, 나를 딸처럼 아끼셨다.

한번도 나에게 딸같다는 말은 하시지 않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첫 부장님, 나의 첫 어른.


사회에 나와 상사답지 않은 사람에게 데일 때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어른스럽지 않은지

알게 해준 사람도 부장님이었다.

날 선 발언도 거침없었지만,

모두를 이해시킬 원칙과 신념이 있던 분.

지도를 펼쳐 함께 가는 길을 설명해 주셨던 분.

위기에 빠지면 누구보다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시는 분,




눈이 부시게 하얀 날에

달콤한 커피향을 풍기며

우리의 발자국을 한발, 한발

함께 새겼던

그 눈길이

오—래 오—래

기억될 소중한 순간임을,

나는 이미 그때

알았다.


기억은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날에

불쑥 다가와

나를 오래 붙든다.


수요일 연재
이전 05화5. 70℃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