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말해야 한다.

by 훈연
“아니야, 나인테일이 이긴다니까!”
“아니, 공격력이 얘가 더 높잖아.
봐봐, 이건 120이고 얘는 180이야."
“아니, 얘는 상대방을 잠들게 한다고!!”


아이는 아빠와 포켓몬 카드 놀이를 하다 점점 목소리가 커진다. 남편은 껄껄 웃으면서도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정확한 룰은 모르지만, 카드에 적힌 숫자와 기술로 즐겁게 전투를 이어갔었던 둘인데, 오늘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둘째와 책을 읽으며 힐끔거리던 나는, 결국 첫째의 외침에 몸을 돌렸다.


“얘는 눈을 보면 잠든다고!!!”


아이는 소리를 꽥 지르더니 안방으로 달려간다. 남편은 어리둥절했고, 나는 황급히 아이를 따라갔다. 텐트 안에 들어간 아이는 문을 닫고는 씩씩대고 있었다.


“지호야, 왜 그래? 엄마 들어가도 돼?”
“흐엉!!”


아이는 서러운 울음을 터뜨리며 내 품에 안겼다.


“지호야, 아빠랑 게임하다가 화가 났어? 왜 화가 났는지 엄마한테 말해줘.”
“아빠가… 흐엉… 내가 이겼는데에… 흐엉… 자꾸 졌다고 하잖아!!”


그제야 사정을 알았다.
나는 눈치를 보며 들어온 남편을 옆에 앉히고 일부러 아이가 듣도록 말했다.


“여보, 당신은 왜 지호 말을 못 알아들어? 나인테일이 이겼다잖아!”
“아니, 공격력이 내 카드가 더 높다니까—”
“공격력이 높으면 뭐해. 지호 카드에는 상대방을 잠들게 하는 기술이 있다고! 그러면 당신 카드는 공격을 못 하지! 그럼 지호가 이긴 거야. 안 그래, 지호야?”
“엄마 말이 맞아…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아빠가 자꾸 아니래… 흐끅.”


지호는 내 말에 위로받은 듯 한결 편안해졌고, 남편은 미안하다고 연거푸 사과했다.
그렇게 작은 전투는 마무리되었다.


나는 아이를 품에 안고 차근히 물었다.
“지호야, 속상했지? 억울하고 답답했지?”
“응, 너무 속상했어.”
“근데 그렇게 화나서 방으로 들어가버리면 속상한 마음이 사라져?”
“아니.”
“그치? 엄마가 지호 마음을 알아주고, 지호가 하고 싶은 말을 또박또박 해주니까 마음이 편해졌잖아.”
“응, 맞아.”
“그럼 다음엔 혼자 들어가지 말고, 왜 속상한지 말로 알려줘. 아빠가 일부러 화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지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응, 알았어.”


나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바랐다.
앞으로는 화가 났을 때 울거나 숨어버리는 대신, 자신의 감정을 말로 설명할 수 있기를.
진짜 승부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나누며, 상대와 함께 풀어가는 데 있다는 걸 배워가길.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 역시 분노를 쏟아내거나 회피했던 수많은 날들이 떠올랐다.


친구, 연인, 가족, 동료.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었던가.
때로는 모르는 척 회피했고,
때로는 웃는 얼굴 속으로 씹었고,
때로는 참고 참다 폭발했고,
때로는 투명인간 취급하며 말을 끊었다.


우리 부부를 돌아보면,
남편은 회피형이고 나는 참다가 터지는 편이었다.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고,
나는 한 번 말을 시작하면 끝을 봐야 했다.
서로의 시간차를 인정하고 존중하기까지,
소통의 간극을 메우기까지 오래 걸렸고,
아직도 그 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소통은 정말 중요하다.
특히 감정이 위험할 때,
이성이 힘을 잃어갈 때,
상대가 보기조차 싫을 때.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말해야 한다.
서로의 입장과 감정을, 눈빛과 표정에 담긴 진심까지도 들으려 노력해야 한다.


모든 소통은 ‘노력’에서 시작된다.
그럼에도 상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그럼에도 나를 제대로 전하려는 마음.


그 마음으로 우리는 말해야 한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서로를 잃지 않기 위해서.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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