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이 찾아왔다.
어린이집에 독감 확진 유아가 생겼다는 소식에 걱정했지만, 주말이 두 번쯤 지나자 예방접종과 마스크의 효과를 믿으며 안심했다. 그러나 바로 그 주 토요일, 첫째가 기침을 시작했다. 단순 감기라 생각했고 병원에서도 별다른 처방을 하지 않아 다시 한번 안도했다. 그리고 그날 밤, 기어이 열이 올랐다.
39.7
두 아이를 키우며 이 정도 숫자에는 이제 내성이 생겼다. 열패치를 붙이고 해열제를 먹이고 옷을 벗기고… 모든 일은 착착 진행됐다. 두 번의 밤을 그렇게 보내고,세 번째 밤에는 둘째도 기침과 함께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칭얼대는 둘째를 재우며 첫째는 남편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재우다 나도 같이 잠들었는지 어느덧 밤 11시가넘었다. 거실로 나오니 남편은 못다 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서로가 “고생했다, 아이는 잘 잤냐”는 마무리 인사를 나누고, 나는 첫째가 잠든 방으로 들어섰다.
아이가 잘 자는지, 열은 없는지 마지막 확인을 위해 침대에 다가간 순간—
내 얼굴에 먼저 열이 올랐다.
아이는 두꺼운 이불을 돌돌 만 채, 마스크까지 쓰고 잠들어 있었다. 서둘러 이불을 확 젖혔다. 손수건으로 머리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마스크를 벗겨 침대 밖으로 던졌다. 이미 베개까지 흠뻑 땀에 절어 있었다.
남편에게 달려간 나는 화를 누르며 말했다.
“열나는 아이한테 왜 이불을 덮어줘?”
“아니 아까는 방이 좀 추웠어. 지가 돌돌 말고 잔 걸… 뭐 어떡해.”
“애가 덮는다고 해도 잠들었으면 당신이 이불은 좀 걷어주고 나와야지! 열나는 애가 이불로 동굴을 만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잖아. 그리고 마스크는 왜 안 벗겨! 내가 쓰고 잔다고 했으면 잘 때는 벗기라고 했잖아!”
“아, 알았어…”
아이들 때문에 소리를 높이진 않았지만, 나는 온 얼굴로 분노를 드러냈다. 남편의 말에도 그런 나를 따라 짜증이 묻어났다. 어제까지 첫째는 내가 케어했고, 분명 자기 전에는 마스크를 벗겼다고 말했는데, 내 말을 대충 흘려듣는 것이 화가 났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도록 열에 둔감한 아빠라는 사실이 더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아플 때마다 대부분의 일은 엄마인 내가 지휘와 실무를 겸했지만, 상식적으로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에게 이불이라니. 이건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무관심의 영역이다.
분노를 쏟아내고 다시 아이에게 돌아와 땀을 닦다가, 손에 닿은 아이의 등이 축축한 걸 느끼자 다시 불에 덴 듯 뛰어나갔다.
“애 옷까지 다 젖었잖아!”
낮았지만 날카로운 소리에 남편도 씩씩대며 아이 방으로 들어왔다. 새 옷을 꺼내 따라가니 남편은 이미 아이를 깨워 옷을 벗기고 있었다. 새 옷을 입히고도 한참이나 아이 몸을 부채질해 주고 나서야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이를 재우다 나도 깜박 잠이 든 적은 부지기수다. 남편도 잠결에 아이의 규칙적인 숨소리만 확인하고 나왔을 텐데… 내가 너무 심했나 싶었다.원망과 동시에 한편으로 죄책감이 밀려와 짧게 “아까 미안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아침부터 아이 독감 검사 때문에 병원과 약국을 오가고, 다시 병원(검사를 안 받겠다며 몸부림치다 팔이 빠져서)까지 다녀온 남편의 고생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내가, 함께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한 스푼 담아 면피용으로 짧게 보내면서, 화가 나면 세세하게 잘못을 끄집어내는 나의 치졸함이 싫어졌다.
다음 날 나는 해열제를 먹어도 열이 내리지 않는 둘째를 어르고 달래느라 엉덩이를 붙이지 못했다. 남편은 아이를 위해 재택근무를 신청했다. 나보다 아이를 오래 본 남편에게 미안함을 안고, 동분서주하다 둘째를 겨우 재웠다.
그나마 첫째는 오늘 컨디션이 회복되어 마음이 훨씬 편해진 터였을까. 거실에 앉아 블랙프라이데이 쇼핑을 검색하고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지친 심신을 달래고 있었다. 남들도 다 한다는 마사지기 하나 살까 싶어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마음에 드는 모델들을 장바구니에 담고, 리뷰를 꼼꼼히 찾아 비교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밤 11시였다. “이제 자야지…” 하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식탁 위에 둔 작은 약병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둘째 해열제는 따로 챙겨두었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 저거… 하—”
그건 독감에 꼭 먹여야 하는 타미플루였다.
저녁을 먹이고 약을 먹이려 했지만, 이미 감기약과 해열제를 교대로 먹던 아이는 약이라면 진저리를 쳤다. 억지로 먹였다가 토할까 봐 잠시 달래서 나중에 먹이기로 했었는데…
그만, 잊은 것이다.
반드시 복용 시간을 지켜야 하는 약을 잊다니.
엄마로서 실격 같았다.
적어도 어제 남편은 약을 잊지는 않았는데…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일에서도, 실수는 일어난다.
특히 퇴근 후 돌아오자마자 아이를 보고, 집안일을 하고, 또 다음 날을 준비해야 하는 부모에게는——
약을 먹이는 일처럼 중요한 일조차 종종 잊어버린다.
누가 보면 “그걸 어떻게 잊어?”라고 말하겠지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
육아의 한복판에서는.
죄책감과 불안에 휩싸여 떨리는 손으로 검색창을 열었다.
‘타미플루 복용 시간 놓쳤을 때’,
‘한 번 빠뜨리면 어떻게 되는지’.
다행히 한 번 정도 놓쳐도 큰 지장은 없다는 답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숨을 고른 뒤, 나는 남편에게 조심스레 내 죄를 고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내일 아침에 둘째 깨면 바로 먹일게, 내가.”
가혹했던 어제의 나를 벌써 잊은 듯, 남편은 담백하게 말했다.
연애할 때는 서로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둘만 있을 때는 그랬다.
그러나 결혼하고 부모가 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사람보다는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는 일에 더 많은 힘을 쏟았다. 그 과정에서 부모로서의 말은 늘었지만 서로에게 건네던 마음은 조금씩 잊혔다.
그래서였을까.
서로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그 시절을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건.
독감의 밤들은 결국 지나갈 것이다.
아이가 두꺼운 이불속에서
작은 동굴을 만들고 끙끙 앓던 밤도,
약 한 번을 놓치고 심장이 내려앉던 순간도,
서로를 향해 쏟아낸 화와 후회도.
하지만 그 밤들 사이에서 내가 배운 것만은
지나가지 않는다.
부모가 되기 전에,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두 사람이라는 것을.
그 사실을 다시 기억해 낸 밤이었다.
잊지 못할,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