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자세 : 여행 (2)
2023년 겨울 방학이었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연인과, 가족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서 캠퍼스를 떠나갔고 저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 집에서 쉬기 위해서 자취방에 남기로 했습니다. 일주일 정도 집에서 밀린 영화와 책을 읽고 나니 콘텐츠가 고갈되었죠. 심심함에 뭐든 했어야 하는데 학교 헬스장도 연말에는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이제 캠퍼스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콘텐츠가 사라지고 난 뒤에 급하게 시카고 여행을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혼자 미국 여행하는 것이 약간 무서운 관계로 같이 갈 사람을 구해보다가 같은 처지의 친한 후배 한 명과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둘 다 낭만을 찾아서 시카고에 가는 비행기와 숙소만 예약을 한 뒤에 무작정 바로 떠났죠. 더 고민해 봤자 아쉬움만 남기에 일단 저지르고 여행계획을 짜기로 했습니다. 가볼 만한 관광지들을 찾다 보니 시카고 미술관이 숙소 근처여서 하루는 미술관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미술관에는 마침 피카소 특별전을 하고 있어서 티켓을 추가로 구매하고 특별전까지 감상을 할 수 있었고요. 하지만 피카소라는 이름의 기대감과는 다르게 감상을 하면서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알던 입체적이고 난해한 작품이 아닌데?' 피카소를 생각하면 쉽게 입체적이고 알아보기 힘든 그림을 그리는 신기한 화가라고만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잘 모르던 피카소의 여러 모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피카소가 어렸을 때 그렸던 그림들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화체의 그림들을 감상하면서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졌습니다.
오랜만에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얼마나 미술을 모르고 살았을까 싶으면서도, 미술에는 평소 관심이 없던 제가 그냥 와봤으니까 들려보자라고 생각을 하고 피카소를 만났습니다. 거기서 그냥 그렇구나가 아니라 피카소라는 사람이 어떤 삶을 살고 왜 이 그림들을 그리게 되었는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니 그의 열정과 천재성을 얇게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피카소의 유명한 작품들은 거의 그의 미술 인생 중후반부에 그려진 작품들이고 제가 얼마나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던 피카소였나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흥미로운 나머지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몰랐던, 관심도 없었던 미술사를, 화가들의 생애를, 그들의 정신을 드디어 마주할 수 있었죠.
물론 제가 그들의 스토리와, 배경 작품의 관련된 지식들을 다 습득하고 이해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저 미술 속에 숨겨진 열정과 그 열정을 실행하는 능력, 본인 삶에 책임을 지며 그림을 그려가던 그들의 태도에 매료되어 조금이나마 닮아보고자 할 뿐입니다.
감명을 뒤로한 채 학교로 돌아간 뒤 저는 미술사의 관련된 책들과, 역사 강의 등을 남은 겨울방학 동안 공부했습니다. 파면 팔수록 흥미로워지는 이 이야기들에 빠져들어 시도 때도 없이 쳐다봤죠. 알 수 없는 열정에 불타올라 작품들을 보고 화가들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그들의 유년기가, 가정환경이, 사회적 가치관에 따라서 같은 사회여도 다른 작품이 나왔고, 다른 사회여도 같은 작품이 나왔습니다. 여기서 자세하게 미술사를 들여다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흘러간다. 이런 식으로 알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불현듯 찾아오는 한 번의 경험에서 '아 이쁘다, 재밌다'가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갔습니다. 몰랐던 사실들을 배우고 분야를 확장하며 새로운 취미와 열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저의 소중한 지적 재산들이 되었습니다. 또 열정을 불태워야 하는 다른 이유를 마주했고,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습니다. 지금도 그때 봤던 그림과 화가들을 어디선가 마주할 때면 그때 타올랐던 열정과 흥미가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여행 속에 자그마한 사건들로 끝날수도 있는 우연들이, 서로 만나서 저에게 배움을 주었습니다. 작은 계기로 시작된 미술 공부는 LA를 거쳐 지금까지도 저의 관심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미술사와 화가들을 섭렵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미술을 공부하고, 그 속에 감추어진 역사와 사회 그리고 문화를 배우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죠. 미술을 통해 배울 수 있게 되었고, 어떤 식으로 미술을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시카고에서의 배움입니다. 시카고를 가게 되신다면 미술관을 꼭 들려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