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제 교사의 교단 일기
좋지 않은 일로 상담을 할 때, 보통 어머님들이 처음에 그런 말씀을 하신다. '우리 애가 애는 착해요. 마음은 여려요.'
그러면서 '나도 내 아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부터, '친구를 잘못 만나 그렇다고 억울하다'는 어머님들까지. 결과는 달라도 시작은 늘 비슷하다.
‘우리 애가 애는 착해요, 마음은 여려요.’라고 말하는 순간 엄마의 마음에는 작고 여린 내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사랑스럽던 유아기, 특별히 잘하는 건 없어도 예의 바르고 착하게 잘 자라 주었던 유년기의 모습이 스쳐 지나갈 것을 안다.
한 엄마가 맞은편에 앉은 다른 엄마의 마음에 애가 쓰인다.
미혼의 나는 학교폭력 관련 상담을 할 때, 가장 큰 원인제공자의 부모가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학생의 부모가, 친구를 잘못 만나 우리 애가 이렇게 되었다고 탓을 할 때면 ‘어머니! 그 친구들에게는 잘못 만난 친구가 어머님 아들입니다.’라고 뾰족하게 일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수업시간에 창가에 앉아 잠을 청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거의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 치밀기도 했다. ‘어떻게 내 수업시간에, 이렇게 중요한 시간에 잠을 잘 수가 있어? 내가 이 수업을 위해 얼마나 준비를 많이 했는데!’
나는 요즘 어떤 아이가 미워 보일 때면, 점심시간에 운동장 벤치에 앉아본다. 수업 시간에는 생선가게 진열대 위에 놓인 선동 오징어 같더니,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모습은 횟감이다! 펄떡인다. 전술 지휘도 제법 할 줄 안다. 달리 보인다. 조금 전까지 운동장에서 펄떡이던 횟감은 수업에 늦지 않게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운동장서부터 4층 교실을 한달음에 올라왔다. 벌게진 얼굴을 식히려 부채질을 한다. 땀이 식으니 전원이 꺼져서 슬쩍 책상에 엎드린다는 게 곤한 잠에 빠진 것일 뿐이다.
웃음이 난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다시 눈이 번쩍 뜨이고 4층 계단을 또 한달음에 내려갔다 올라오리라.
1타 강사 강의가 클릭 한 번으로 펼쳐지는 시대에, 학교 선생이랍시고 내 수업을 무조건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내가 생각해도 논리가 조금 부족하다. 실력이 부족하니 조금 편법을 써가며 아이들을 다독여 수업에 끌고 온다.
‘OO아, 오늘 축구하는 거 선생님이 봤는데, 너 정말 멋지더라. 선생님은 운동하라 하면 왼발 왼팔 같이 나가는 사람이라, 너처럼 운동 잘하는 사람이 그렇게 부럽더라.’
칭찬을 받은 18살 9척 장신은 마음은 여리다. 배터리가 곧 방전될 것처럼 위태위태해서 헤드뱅잉을 하면서도 엎드려서 자진 않는다. 애썼다. 그걸로 되었다.
‘네 어머니 저도 알아요. OO이가 착한 거. 그리고 저는 그 아이가 펄떡펄떡 살아 있는 모습도 보았답니다.’
누구를 만나건 우선 그 사람의 부모가 그를 낳고 키우면서 기울였을 애착과 정성을 봅니다. 이제는 말도 잘 안 듣고 공부도 잘 못하는 학생들에게 더 관심이 갑니다.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게 보입니다. -정치학자 라종일-
엄지혜, <태도의 말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