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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안 Feb 01. 2023

브런태기(?)와 꼰대 탈출기

1.

제 글을 객관적으로 놓고 보니 형편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어느 작가가 말하길 나쁜 글은 ‘내성적인 글’이다.라는 평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기록을 꼼꼼히 해두지 않아서 어떤 작가의 어떤 책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제 글이 순간순간 드는 생각을 모아두기만 했지, 읽는 사람에게 어떤 효용을 주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자가 다 읽고 나서 ‘그래 알겠는데,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물음을 남겨두고 끝맺는다는 느낌이요.


브런치에 저와 자기소개를 같이 하는 작가님이 출현하고 나서 글쓰기 자존감이 꽤나 많이 떨어졌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정황상 추측일 뿐 사실이 아님을 미리 밝힙니다. 어떤 작가님이 제 브런치를 구독합니다. 알림을 확인해 보니 필명이 저희 엄마 아명과 같이 기억이 인상이 또렷했는데, 작품이 없어 맞팔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브런치 알고리즘이 그 작가님의 첫 게시글을 저에게 추천해 주었어요. 엄마 계약직 교사라는 자기소개가 일치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이건 ‘copy야!’라는 강한 확신에 빠졌다가, 엄마와 계약직과 교사라는 세 단어를 나란히 두었다고 ‘copy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흐려지더니, 세상에 엄마면서 계약직이면서 교사인 사람의 이야기가 그저 흔한 평범한 이야기라며 글쓰기 자존감이 낮아지더군요. 고유성이 창조성이라 순진하게 믿는 초보 작가의 자아를 흔들만한 사유구조였습니다. 급기야 해당 작가님이 제 글을 받아보지 못하도록 차단해 버렸습니다. 제가 이곳에 저의 이런 지질함을 말하는 이유는, 부끄러움에 비난이라도 받으면 일면 제 속이 좀 편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시 차단을 해제하고 댓글로 속죄를 해볼까 하다가, 그 또한 구질구질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내 포기합니다.


2.

어떤 것에 쓰일지 모른 채 머릿속에 담아 두었던 몇 개의 문장이나 내용들이 서로 강한 화학반응을 하며 한층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인스타그램에서 동기부여 영상을 하나 본 적이 있습니다. 누구의 의견이었는지, 주제의 정확한 문장이 어떻게 쓰였던 지 등 세부적인 내용은 기억이 이미 흐려졌습니다. 그저 영상이 주는 메시지의 신선함만 강렬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영상의 내용은 이러했을 겁니다. 성공하는 습관, 부자가 말하는 시크릿 등 성공한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의 법칙은 한마디로 ‘개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결과론적인 이야기 일 뿐. 그들이 정상에 올라 지난날을 회고해 보니 ‘이런 것 때문이었다.’ 짐작일 뿐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숨은 메시지는 이러했습니다. ‘당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방법이 맞으니 (성공한 사람들은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져 있는지도 모르고 완벽하게 나와 같을 수 없으니) 그저 당신이 확신하는 방법으로 밀고 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 영상이 이토록 제 머릿속에 남아있었는지는 최근 신형철 작가의 ‘인생의 역사’를 읽고 알았습니다.

3.

저는 최근 ‘인생의 역사(신형철)’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답니다. 다른 책을 읽어도 제 정신의 거대한 줄기는 ‘인생의 역사’를 붙잡은 채, 새로운 책을 읽어도 잠시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주다 휘발되었어요. 책을 다 읽고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에 물성을 주며 털어낸다면 어떤 내용이 떨어질까 생각해 보았어요.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새 해석이었습니다. 이 시는 주로 정치인이나 대학 교수 등 남들이 쉽게 선택하지 않은 분야에서 한 업을 이루신 분들이 은퇴식에서 낭독하는 시로, 선구자적 면모를 드러내는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등학교 문학시간에 이 시를 배우면서 교과 선생님께서 다들 가고 싶어 하는 학과 말고 비전 있는 학과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이 시에는 통일성을 해치는 하나의 연이 있습니다. 2 연입니다. ‘물론 인적으로 치자면, 지나간 발길들로/두 길은 정말 거의 같게 다져져 있었고.’ 부분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나이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사람들이 덜 지난 길 택하였고/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를 기억하는 독자의 감동에 위배되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을 두고 데이비드 오어는 '우리가 우리 인생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축하려 할 때 범하게 되는 자기기만적인 논평'이라고 평합니다.


몇 해 전 보았던 인스타그램의 동기부여 영상과 연결되며 강한 시너지가 머릿속에서 생기는 듯했습니다. 수능을 위해 내신 등급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내 학생들이 서울대 간 선배 유투버를 팔로잉하며 그 선배와 습관 하나하나가 같지 않음을 확인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임용고사에 통과하지 못한 ‘요 모양 요 꼴’의 내 인생이 단지 시험하나의 성패에 따라 유의미하거나 무의미해지지 않다는 것을. 육아를 이제 막 시작한 초보 엄마에게 애 둘 키워봤다고 이런저런 팁을 주는 내가 자기기만적인 꼰대라는 것을. 그래서 다짐해 봅니다. 나는 앞으로 다른 사람의 인생에 참견하지 않겠다고. 내가 성공한 방법이-일가를 이루며 대단한 업을 남긴 것이 없으니 성공이라 칭하기도 민망하지만-다른 사람의 상황에 당연히 들어맞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이니까요. 그것이 제가 가르치는 학생이라 할지라도, 누가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면 그저 옆에서 박수 쳐주고 흐뭇하게 바라봐주는 것이 타인의 역할이라는 것을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4.

꼰대 되기를 포기하고 나니 관점이 사뭇 달라집니다. 유명 작가, 출간 작가, 구독자가 급증하는 작가 그런 결과론적인 기준이 글 쓰는 과정과 내 자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계속 읽고 써보며 찾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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