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실을 가겠다는 아이와 꾀병이라는 친구들에게.
수업종이 울리고 복도에서 한 아이가 나를 목적지로 정해 달려온다. 광광 울음소리를 내면서.
“진서야 왜? 무슨 일이니?”
“생리통 때문에 배 아파서 엉엉 남자애들이 꾀병이라고 놀리잖아요. 흐엉엉”
“그랬구나. 많이 아프니?”
“담임 선생님 불러주세요. 담임 선생님한테 다 말할래요.”
“아, 지금 담임 선생님은 수업 중이실 것 같고, 선생님이랑 이야기하자.”
“개XX들이 지들이 뭘 안다고. 아파서 디X 것 같은데”
“그래 아픈데 그러면 속상하지. 개XX들이 누구야 선생님이 혼내줄게. 아이고 많이 아픈데 속상하기까지 하구나. 보건실 가야겠네. 그렇지? 혼자 걸을 수 있겠어?”
생리통에 아파서 죽기 직전이라는 아이는 울음소리에 비해 자세가 꼿꼿했다. 보통 생리통이 힘들면 아이들 허리가 숙여지게 마련인데, 눈물 닦는데만 바쁜 손은 배나 허리로 한 번 향하는 법이 없었고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도 씩씩했다.
교실로 들어서며 인사를 생략하고,
“진서 울린 친구 누구니?”
“양하준이요.”
“하준이 할 말 있으면 해 볼래?”
“선생님 진짜 전 억울해요. 김진서는 만날 보건실가요. 제가 반장인데 선생님들이 진서 없으면 저한테 어디 있냐고 묻고, 이동수업가도 늦게 오고. 안 아파요 제가 알아요.”
생리통이 꾀병이라고 말하던 하준이도 물러설 틈이 안 보인다.
“그래 하준아. 아마 진서가 운 데는 네 잘못이 100프로는 아닐 거야. 아프고 기분이 안 좋으면서 99프로 화가 차 있었는데, 네가 티스푼 하나만큼 화를 더했어. 그게 흘러넘친 것뿐이지. 선생님도 알아. 진서 보건실 자주 가는 거. 그런데 아픔의 기준은 누가 정하니? 슬픔의 기한은 누가 정할까?”
진서는 정말 보건실에 자주 가는 학생이었다. 내 시간에도 10분 정도 지각하는 것은 일쑤라, 소재가 파악이 안 되면 어디 가서 사고라도 나지 않나 노심초사 여기저기 내선을 돌리곤 했었다. 다른 반에 수업을 간다고 복도를 지나가다 보면, 홈베이스 벤치에 상담 선생님이 진서 등을 토닥이며 여러 말씀을 나누는 것도 보았다. 수업이 있는 날만 출근하는 시간강사가 전해 들은 이야기는 없고 ‘진서는 학교에 마음을 붙이기가 어려운 학생이구나.’ 정도로만 짐작했다.
“어떤 사람의 사연을 속속들이 알면, 우리가 그 사람의 상처와 아픔을 외면하기가 힘들어져. 익명화된 타인은 뉴스에 아무리 흉흉한 기사의 주인공이 되더라도 안타까운 마음이 잘 안 생기는데, 같은 반 친한 친구가 오늘 남자친구랑 헤어져서 울면 그게 꼭 내 일처럼 아픔이 전해지지. 내 손톱 밑에 가시가 제일 아프다는 말이 왜 나왔겠니. 내가 가진 아픔과 슬픔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크게 느껴진다는 거야.
2014년에, 너희는 몇 살이었지?(다섯 살이요). 그래 천지 분간 못할 나이었구나. 그 해 4월 16일에 배가 한 척 침몰했어. 대부분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이었고, 선생님도 고등학생 아이들을 가르치며 가까이서 지내던 사람이라, 그때의 그 충격을 아직 잊지 못해. 나를 비롯한 전 국민이 안타까운 아이들의 죽음을 기억하며 우울증에 걸렸던 것 같아.
자식을 잃은 부모 마음은 오죽했을까. 원인이라도 알고 싶어서, 진상을 규명해 달라는 유가족들이 광화문에서 단식 농성을 해.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반대집회가 열려. 피자와 치킨과 자장면과 냄새가 진한 음식들을 시켜놓고 배고프면 먹으라고, 이제 당신들의 슬픔이 지겨우니 그만하라고 반대하는 조롱 집회가.”
“아, 진짜 짐승만도 못하네요.”
“그래 그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광화문에서 일어났어.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슬픔과 아픔은 비통한데, 생리통으로 힘든 진서 몸과 마음은 아프지 않은 걸까?”
“에이 선생님, 그거랑 그건 다르죠.”
“다르지. 다른 문제지. 그런데 조금만 더 시각을 넓혀보면, 타인의 고통과 아픔 슬픔이라는 측면에서는 분명히 같은 스펙트럼에 존재할 것 같구나. 진서가 보건실에 항상 아파서 갔다고만은 생각 안 해 선생님도. 그런데 지금 진서가 0.00001%의 아주 희박하지만 진짜 아프다는 가능성을 하준이 네가 배제할 수 있을까? 진서 몸의 주인은 진서인데, 고통을 느끼는 것도 진서고.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다 해서 그걸 타인이 확신할 수 있을까 말이야. 물론 오늘 정말 안 아플 수도 있어. 그렇지만 안 아픈데 속아서 보건실에 보내주면서 생기는 피해보다, 정말 아픈데 보건실을 안보내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피해가 훨씬 심각하잖아. 그러니까 따지지 말고, 아프다고 하면 들어주고 보내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 슬픔의 끝은 누가 정할까? 슬픈 사람이. 아픔의 끝은? 아픈 사람이. 선생님 생각은 그래. 그리고 하준아, 선생님 말에 동의한다면 진서에게 사과했으면 좋겠다.”
진서는 약물 치료 후에 잠시 안정을 취한 뒤 잘 돌아왔고, 메신저로 보건 선생님께 경과도 들었으며 해당 사실을 담임 선생님께 보고도 했다. 수업 마침종이 울리고 하준이가 진서에게 쭈뼛거리면서 간다. 자기 마음 몰라준다고 광광 울면서 뛰어다니는 아이나, 그걸 꾀병이라고 용감하게 놀리고서는 사과하란다고 사과하는 아이나. 아직 때가 덜 묻은, 그런 귀여운 구석이 있는 녀석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