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를 실현해 줄 거래처를 찾아서

by 글지안

창업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나서는 내내 선택의 순간이었다. 각종 교육프로그램이 제공되었지만, 결정과 사업 방향은 전적으로 대표인 내 몫이었다. 족집게 과외 선생님 있을 것이라는 대단한 착각을 했다. 실전의 세계를 전혀 모르는 어린 아이가 덜컥 어른들의 세계로 입문한 느낌이었다. 복잡한 행정 과정과 업무 시스템은 ‘그래 남의 돈 쓰는 일이 쉬운 줄 알았나.’라는 생각을 절로 들게 했다. 내 주머니에서 추린 돈이 아니므로, 사업금을 쓸 수 있는 용처에 제약이 많았고, 돈을 쓴다고 하더라도 증빙해야 할 행정 절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절차와 서류는 사업 초보인 나를 비틀거리게 하는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부정한 곳에 돈이 새지 않게 하기 위한 나름의 합리적인 장치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업은 나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디자인 업체를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 학습지를 만들 가능성이 있는 인쇄물 제작 경험이 있는 회사, 그러면서도 읽기 쓰기와 관련된 판촉물을 제작했던 경험이 있는 회사. 그런 회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디자인, 디자이너, 디자인 회사에 대한 명확한 정의도 내리지 못한 채, 나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있는 회사가 어디에 있을까 방황했다. 학습지를 제작하면서도 교과서나 학습지만을 제작하는 전문 출판 업체와는 연결을 피했다. 내가 제작하고자 하는 학습지의 형태가 실용적인 교육 목표를 달성하는 학습지의 본질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만큼, 전형적인 디자인을 피하고 싶었다.


인쇄물, 읽기 쓰기와 관련된 굿즈를 떠올리니 자연스레 문구류가 생각이 났다. 문구류를 유통하는 업체에서 거래하고 있는 디자인 및 제작 업체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문구 브랜드들을 팔로우했다. 가장 먼저 국립현대미술관 굿즈 중 작품을 재해석한 것이 인상적이었던 문구 업체를 팔로우하고 거래처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 업체가 참여한 페어에서 함께 작업했던 스태프들의 레퍼런스를 꼼꼼하게 기록해 둔 피드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인쇄물을 담당한 것으로 추측되는 곳을 찾았다.


디자인과 브랜딩의 비용이 최소 2천 만원 이상일 것이라는 업계의 이야기를 듣고 잔뜩 위축이 된 상태로 연락을 시도했다. 내가 하고 있는 정부 지원 사업의 개요, 시니어를 위한 자서전 쓰기 학습지를 개발한다는 사업 아이템, 최대 사용할 수 있는 비용이 1천 만원이라는 밑천을 다 드러내 보이면서. 사업의 기본은 모르지만, 서로 간의 괜한 오해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금액부터 밝히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미 인지도가 있는 브랜드의 작업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업체에서 거절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답변은 긍정적이면서도 적극적이었다. 시대에 필요한 일을 하신다는 인사를 시작으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두 분의 대표님이 찾아 오신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성사가 될지 말지도 모르는 계약을 위해서.


업체의 실력이야 이미 내가 온라인으로 탐색해 본 포트폴리오로 충분히 파악했고(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온라인에 드러난 포트폴리오보다 더 방대하고 멋진 결과물을 내고 있었다.) 첫 미팅에서 묻고 싶은 것은 이분들의 가치관이었다. 어떤 철학으로 업체를 운영하는지 그 결이 맞아야 작업하는 내내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았다. 첫 미팅 장소에서 내가 준비한 질문과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브랜드를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는지, 사용자가 나의 브랜드를 어떻게 느꼈으면 하는지 등을 물어보시고는 답변을 꼼꼼히 메모하셨다. 눈빛과 단어 선택에서, 경청하는 자세에서, 이미 계약을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보통 어떤 업체를 만나면 자신들의 경력을 늘어놓고 자랑하기 바쁠 것 같은데 어떤 대단한 업체와 작업했는지 과시하지 않는 부분도 마음에 꼭 들었다.


사업 초보인 나는 어이없는 질문과 요구를 종종 했다. “제가 개발한 툴킷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증명하려면 실제로 자서전을 출판해야 할 것 같아요. 학습자들이 글을 써서 책을 출판해보고 싶은데요, ISBN도 찍어 주실 수 있나요?” “하하 대표님 ISBN은 사업자의 주민 번호를 빌려주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일이라서요. 과정이 어렵지 않습니다. 저희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초보 사업자를 가르치며 사업을 진행해야 했다. “저는 이런 종이로, 이런 방식의 제본을 하고 싶은데요.” “대표님 이건 현재 예산으로서는 조금 어렵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내가 그동안 책을 봐오면서 출판물에 대한 기대치가 예산 대비 한껏 높아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500부 이상 대량으로 인쇄하는 것을 뭐라고 하셨죠?” “옵셋 인쇄 말씀하시는 거죠?” 가르쳐줬던 용어를 묻고 또 물었다. “저 대표님들께 털어놓을 고민은 아니지만, 자서전을 괜히 시작한 것 같아요. 이미 포화 시장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자서전이 리마인드잖아요. 이렇게 접근 해보면 어떨까요? 예를 들면…” 때때로 위축되는 나에게 용기도 불어넣어 주셨다.


담보되지 않는 미래로 약속을 하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의미한 공수표인지 알면서도, 나의 거래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꼭 성공해서 이 분들께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성장하리라.’ 막다른 골목인 것 같다가도 실마리가 풀리는 것은 언제나 우연이었다. 내 인생은 행운으로 점철된 듯 우연히 주어진 만남과 기회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도와줬다. 간절한 마음이나 몰입이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이끈 것인지, 원래부터 나의 주변에 존재하던 것들이 간절함 때문에 발견된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쪽이든 확실한 것은 내게 감사한 인연들이 때마침 연결되었고, 선의를 가진 이들의 도움으로 내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나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사를 잊지 않겠다는 마음이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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