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를 다시 구성하게 제안한 것은 사실상 나와 거래하고 있는 디자인 업체의 공이 컸다. 이미 책을 읽는 사람은 잘 안다는 유명 문구 브랜드의 지류 상품들을 제작하고 있는 업체였다. 브랜딩 과정부터 함께, 아니 경험 많은 거래처의 주도로 방향을 찾아갔었다. 만년 다이어리를 구상할 때 어떤 식으로 구상하면 좋을지 내 의견을 물어봤었는데, 그냥 일반적인 다이어리 형태로 제작하겠다고 ‘알아서 잘 제작해 주십사’ 대답했다. 업체에 자율성을 주겠다는 말은 내가 핸들링하지 않겠다는 무책임한 말이었다. 시간제 근로와 양육자로서의 일에 더불어 창업 일까지 더해진 나에게 다이어리 제작까지는 깊게 고민하고 싶지 않은 업무였다.
1차 제작 시안을 공유하며 업체가 다시 제안을 했다. ‘대표님의 원래 브랜드 계획 중 하나로 감각의 수집이 있었잖아요. 그 부분을 반영했으면 합니다.’라고 조심스레 의견을 표해주셨다. 부끄러웠다. 내 이름을 걸고 하는 브랜드에 거래처 대표보다 고민을 적게 하는 사장이라니. 정신을 차리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만년 다이어리의 각 구성마다 소개하는 글을 쓰고, 브랜딩 과정에서 녹여낸 스토리도 반영했다. 원고를 보면서 업체는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했다. 디자인 시안을 완전히 바꾸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했다. 원고의 내용을 보니 디자인의 방향을 바꿔야할 것 같다며 표지부터 내지 구성까지 완전히 다른 디자인 시안을 보내주었다. 종이의 질량까지 고민하고 제안했다. ‘대표님이 제작하고자 하는 다이어리는 책이 되기 이전의 책이라는 컨셉이잖아요. 일반적인 노트에 사용하는 모조지 80g 대신 100g을 사용하겠습니다.’ 제작 단가는 당연히 올라갔다.
함께 완성해 나가는 작업의 결과물은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만족스러워서 수정을 거듭할수록 애착이 더해졌다. 브랜드는 더 이상 나 혼자만의 브랜드가 아니었다. 갖고 있는 다이어리들의 장정을 살펴보았다. 어떤 형태의 정보를 기재하는지 가격 말고 어떤 스토리가 담겨 있는지 탐색했다. 불현듯 ‘책이 되기 이전의 책’이라는 컨셉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서 업체에 제안 메일을 보냈다. 우리 이 다이어리에 서지정보를 적으면 어떨까요? ISBN은 적지 못하지만 기획과 제작 디자인 인쇄 등 작업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은 적을 수 있잖아요. 대표님들의 회사명이나 이름을 적었으면 합니다. 이제 시작하는 작고 작은 브랜드의 제품이지만, 이 분들의 노고를 박제하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상품의 한 켠에 소비자가 볼지 안볼지도 모르는 서지정보를 적겠다는 결정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엔딩 크레딧을 넣어 수개월간의 대장정에 참여한 스태프들의 이름을 적는 것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엔딩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업체는 기쁘게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의 마음이 전해진 것 같아 따뜻한 기운이 가슴에 번졌다.
문제는 제작이었다. 사업에서 돈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조건이었다. 다이어리도 책처럼 오프셋 인쇄로 제작이 되려면 최소한의 주문 수량이 500개가 되어야 했다. 이미 나만의 것이 아닌 상품이 브랜드 대표 역량과 자본의 부족 문제로 세상에 나와 보지도 못하는 위기에 처해졌다. 사업의 추가 자본금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당장 500개나 제작할 돈이 수중에 없었다. 샘플로 받아볼 수 있는 50권의 다이어리를 가지고 제품의 홍보 필승전략을 세워야 했다. 만드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지 큰 과제가 내게 주어진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