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vp 개발과 문제를 대하는 대표의 자세

by 글지안

30대 초반에 화장품 회사에서 세일즈를 했다. 연고 없는 지역으로 결혼 후 이주해 오면서 새롭게 갖게 된 직업이었다. 학교 경력밖에 없는 내가 갑자기 세일즈의 세계로 뛰어든 것은 사람들에게 물음표로 남았다. 구구절절 사연을 설명하기가 곤란한 경우에는 ‘그냥 한 번 도전해보고 싶었다.’는 짤막한 답변으로 넘겼다. 두 아이를 출산 하고 새롭게 맺은 관계는 더욱이 나의 과거에 대해 아는 바가 전무하다. 읽기와 쓰기의 무용함으로 행복을 채워가는 지금의 내 모습을 아는 지인들은 특히나 그럴 것이다. 내향인인 내가 도어 투 도어로 방문 영업을 했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못할 것 같다. 어쩌다 그 시절 이야기가 나올 것 같으면, 다른 이야깃거리로 대화의 흐름을 돌리거나, 나중에 때가 되면 말하겠다며 시기를 늦췄었다. 지나친 관심과 궁금증의 대상이 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특별히 회상하지 않고 시간이 흐르다보니 나에게 그런 때가 있었나 아득했다.


창업의 세계로 접어들면서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까 고민하던 때마다 자주 그때의 기억을 소환했다. 내가 처음에 고객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문제가 해결된 것은 어떤 노력을 했을 때인지 기억을 더듬었다. 도서관에 강의를 개설하자는 제안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진행하는 사업 모델은 수익 구조가 크게 두 가지였다. 글쓰기 학습지를 기반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을 구상해서 B2G로 사업 소득을 내는 것. 기념 출판을 원하는 소비자를 찾아 B2C로 수익을 내는 것. 어째서 그런 충동적인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만든 커리큘럼의 성공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학습자가 쓴 글을 책으로 출판하는 것 만큼 확실한 것이 없었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 실버타운, 지역의 작은 도서관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강의 제안서를 만들고 기관 홈페이지에서 교육 담당자 전화번호를 받아 적은 다음에 전화를 돌렸다. 전화를 하기 전까지는 수백번 고민을 하고, 오늘 전화하지 못할 이유를 만 가지 찾아놓았다가도, 전화가 막상 연결이 되면 나도 모르게 자신감이 붙고 제안 설명이 이어 나왔다. 화장품 세일즈를 하며 무작정 거리로 나가 홍보를 할 때 모습이 떠올랐다. 가게 문을 열까 말까 문고리를 잡고 고민하면서도 밀고 들어가야만 가능성이 시작됐다. 교육 담당자에게는 현재 내가 진행하는 사업 모델의 개요와 정부 지원금의 성격을 이야기하며 강사료는 받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강의 프로필을 쌓는데 집중하려면 매몰 비용이 아니라, 홍보 비용을 지출하는 셈 치기로 했다.


교육 담당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업계에서는 잡상인이나 다름없는 나와 대화를 빨리 종료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반면 전화상으로도 친절하고 호의가 느껴지는 교육 담당자도 많았다. 그러나 대화를 빨리 종료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나 친절한 사람이 내겐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의 친절함은 거절의 여백을 만들기 위해 대화 중에 공고히 쌓고 있는 장치임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내 이력에 대해 꼼꼼하게 질문을 하고, 성사가 될지 안될지 모른다고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담당자에게 오히려 신뢰가 갔다. 일이 성사되는 경우는 언제나 나와 상대방 앞에 놓인 장애 요소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하나씩 제거했을 때였다. 예산 부족의 문제로, 시기의 문제로, 장소 협조의 어려움으로 거절을 많이 당했다. 한 지역 도서관은 성사가 되는 쪽으로 일이 진행되었는데, 교육 담당자가 포스터를 만들고 결재만 올리면 되는 상황이었다. 참여하는 시니어들에게는 방법의 친숙도를 위해서 방문 또는 전화로 접수를 받겠다는 적극적 제안도 해주셨다. 일을 도모하면서 완성해 나가는 과정, 생면부지의 사람이지만 나와 인연이 닿아 함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뿌듯했다.


통화가 예정돼 있지 않던 낯선 시간에 담당 주무관님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가 울렸다. ‘아, 뭔가 일이 잘못 됐구나.’ 교육 담당자는 결재 라인 중 교육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팀장님이 강의 개설을 반대했다고 했다. ‘다음 번에 더 좋은 기회가 되면 모시겠다.’는 뻔한 말을 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용기를 내서 주무관님을 붙잡았다. “주무관님, 저 솔직한 이유를 듣고 싶은데요, 혹시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말씀해 주실 수 없나요? 제가 수정 보완해서 다른 곳에 지원해 보고 싶어 그럽니다.” 수화기 너머 담당자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간 쌓아 온 신뢰 때문이었을까, 어렵사리 운을 뗐다. “저, 아무래도 무료인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하세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종교나 제품 판매 등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강사님, 아마 저희 지역 내에서는 어려우실 것 같아요. 이 팀장님이 전체 교육 프로그램을 총괄하시거든요.” 어안이 벙벙했다. 다른 이유도 아니라 무료이기 때문에 거절을 당한다니. 인문 강좌를 개설해 조직적으로 접근한 사이비 종교의 전도 방법이 뉴스에 보도 된 적 있었다. 무료라는 유명 강사의 강의를 듣게 되면, 금융회사에 개인 정보 일부를 넘겨줘야 하는 시스템을 고려할 때 지나친 염려라고 볼 수도 없었다. 호의를 의심해야 하는 사회에서 내가 접근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일이 쉽게 풀리지 않으면 나는 묘하게 기운이 난다. 반골 기질인지 승부욕인지는 몰라도 상황에 쉽게 절망하고 싶지가 않다. ‘어라, 얼마나 더 큰 것이 나에게 오려고?’ ‘그래 진짜는 쉽게 오지 않는 법이지.’ 신앙심이 깊지도 않으면서, 마지막 주일 미사 참례가 언제였는지도 모르는 냉담자 주제에. 이럴 때 꼭 하느님을 소환한다. ‘저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이런 방법을 택하셨단 말이죠?’ 내 인생을 끌고 가는 흐름이 정말 신의 요광의 손길인지 아직 확인할 길이 없다. 화장품 세일즈가 내게 남긴 것은 과거의 영광이 아니다. 매출이 얼마였고, 성공 사례로 사보에 언제 소개되었고, 어떤 프로모션을 달성했고 등은 대체로 기억이 희미하다. 그때 경험으로 내가 진짜 얻은 것은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절망하지 않고 끈기 있게 두드리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길이 열린다는 것. 그렇게 어렵게 주어진 기회가 더욱 값지고 빛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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