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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E Jul 22. 2024

엄마, 우리 집 너무 좋다(4)

- 엄마의 첫 정원, 텃밭

정말로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집에서 꽤 오랫동안 살았던 것 같다. 화장실이 없어 2-3분 거리에 있는 친척집의 화장실을 사용했었고, 곧 차서 넘칠듯하고 널 반지 두 장에 웅크리고 앉아 힘을 주면 곧 무너져 깊이를 모르는 똥 구덩이에 빠질 것 같아 그 화장실을 가는 것은 꽤 큰 용기가 필요했다. 특히, 컴컴한 밤에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워 집 인근 어딘가에 아무 데나 일을 급히 본 적도 꽤 있었다.


그나마 이 집은 화장실은 없었지만 우리 식구만 사는 일종의 "단독주택"이었고, 그전에는 남의 집 방 한 칸을 빌려 살았다고 하는데 다행인지 그 기억은 전혀 없다. 내 삶의 첫 집은, 정확히 내가 기억하는 첫 집은 바로 밤마다 쥐가 천장을 달려 다니는 소리로 소란스럽고, 벽 귀퉁이에는 견고하게 공사되지 않은 흔적인지 흙가루가 잔뜩 쏟아져 커다란 풍선 같이 벽지가 부푼 모습이 군데군데 보였다. 추운 겨울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할 때면 밤새 스멀스멀 방을 덮쳤던 연탄가스 덕에 어지럼증을 느끼거나 순간 휘청하는 일들이 제법 있었고, 제대로 되지 않은 전기 배선을 만지다가 찌릿찌릿한 전류를 느꼈을 때도 꽤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쩜 그리도 못 살았나, 어쩜 그렇게도 낡은 집에서 다섯 식구가 별 탈없이 살았었나 싶은데 다행히도 그때 내 집이 얼마나 누추하고 허름했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진 않았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13살, 6학년이 되던 해 우리는 내 첫 집과 인근 5분 거리 정도의 위치에 제법 집다운 집을 구해 이사를 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게 두 개의 방이 있는 집에 성큼성큼 들어가 안방에 큰 대 자로 드러눕고, 엄마도 옆에 눕고, 오빠도 눕고 그리고 언니도 마저 눕자 가장 어린 내가 "엄마, 우리 집 진짜 좋다" 말하고서는 우리 넷이 맞아 맞아하며 크게 웃었던 기억,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행복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래 - 그 행복했을 때 우리 옆엔 또 아빠는 없었지.


이 집에는 드디어 화장실이 있었고, 여럿이 앉을 수 있는 마룻바닥도 있었으며 평상을 놓고도 남을 마당과 아담한 텃밭이 있었다. 화장실은 여전히 곧 넘칠 것 같은 얕은 깊이여서 얼기설기 얽혀있는 구더기들이 보이고 어린 나의 몸무게도 못 버틸 것 같은 널 반지 두 장이 놓여있었지만 그래도 "우리 집 화장실"이고 그것이 우리의 공간 안에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 옆에 그 화장실의 넘치는 것들을 적절히 받아서 소비해 주는 아담한 우리 집 텃밭, 엄마의 정원이 있어서 더 좋았다.


오밀조밀 채소를 심었는데, 쪽파, 대파, 양파, 당근, 배추와 무 같은 게 계절에 맞게 자라고 있었고, 한 번은 중학생이지만 제법 어른인척한 듯한 언니가 텃밭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뭔가를 마시며 앞에 보이는 바다를 멀리 쳐다보며 글을 끼적이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옆에서 살짝 보니 "바다를 바라보며 원대한 꿈을 꾼다"라고 썼던 것 같다. 어린 나는 "원대한"이라는 뜻을 잘 몰랐던 것 같은데 그 문장이 뭔가 웅장하고 멋있어 보여 학교 백일장과 같은 곳에서 종종 써먹었던 적이 있었다.


작은 체구의 엄마는 그 텃밭을 마치 본인만의 궁전처럼 느끼는 공주처럼 해맑게 웃으며 어디선가 얻어온 꽃이며 과실수를 종종 심고는 정말로 행복해했었다. 그 정원을 대부분 차지하던 배추, 무와 같은 채소는 금방금방 자라나 유용했지만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우리의 생계와 같은 처연함이 있었던 것 같으나, 비록 텃밭 가 영양분도 닿을 것 같지 않은 곳에 차근차근 심어 채워가는 장미나 백합, 혹은 딸기, 배와 같은 과실수 같은 것은 꽃을 피기까지 시간이 더 오래걸렸지만 엄마에겐 행복이고 낭만이었던가보다. 어쩌면 고된 하루를 보내고 텃밭으로 들어가 오늘 저녁 주린 배를 채울 채소를 뜯을 때는 의무와 책임감이 그 작은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였겠으나, 새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그것들은 감추거나 꾹꾹 누르며 드러내서는 안 되었던 엄마의 아직 여리고 소녀같은 감성과 맞닿아 있었나 보다. 


유독 보라색의 꽃을 좋아하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한국에 도착하면 바로 그 색의 꽃을 잔뜩 사들고 엄마를 보려 가야겠다. 보라색 꽃을 엄마 앞에 놓고, 혹은 엄마에게 보여주고는 그때 그 텃밭에 있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때라도 마음이 힘들지는 않고 위로가 되었는지 물어봐야지. 그리고 나는 그 텃밭에서 엄마가 소녀처럼 꽃을 심고 가꾸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서 텃밭을 갖고 싶다는 꿈을 항상 갖고 산다는 말을 꼭 해줘야지, 엄마랑 꼭 그렇게 같이 살고 싶은 꿈이 있어서 늘 시골 가서 살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거라며 긴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엄마가 답을 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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