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Scelsi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개념으로 풀어낸 유재하의 명곡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는 1987년 발표된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에 수록된 동명의 발라드곡이다. 이 곡이 발표되었을 당시 한국 가요계는 조용필이 국민가수로 활발히 활동하며 여전히 트로트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곡들과 가창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들국화, 김현식, 조동진 등 재즈 화성을 받아들이고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새로운 음악의 장을 형성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때 유재하의 음악은 처음에 평론가나 방송 pd 들에게서 ‘음정이 불안하다’ 거나 ‘박자가 맞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환영받지 못했으나 차츰 타이틀 곡 ‘사랑하기 때문에’가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어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본인의 작사, 작곡, 노래로 채워진 1집 음반이 발매되던 해 교통사고로 유재하는 이 세상을 등졌다.
필자가 이 곡을 편곡하게 된 계기는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 기초한 음악극을 쓰게 되면서였다. 그렇게 시작된 편곡은 다양한 시, 음악, 영화들과 중첩되며 의미가 심화되었으며. 결국 기존 대중가요의 맥락에서 확장되어 새로운 조명이 비추어졌다.
1. 은유 ; G. Scelsi “Un Adieu” 와 ‘사랑하기 때문에’
은유란
유에서 종으로, 혹은 종에서 유로,
혹은 종에서 종으로, 혹은 유추에 의하여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하는 것이다.
나는 이 곡의 피아노 파트를 G. Scelsi의 곡 “Un adieu”와 병치시키며 편곡해 나갔다. 작곡과정에 언제나 유사곡들을 병치시키고 그 가운데 접점을 찾아나가는데 이런 점에서 작곡과 편곡의 경계는 꽤 모호하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여러 겹의 이미지가 겹쳐진 다층적 레이어로 된 미술작품의 창작과 같이, 멀리 있다고 여겨지는 요소들이 만나며 개별 작품의 보이지 않던 의미들이 선명히 드러나게 된다. 유재하가 직접 노래한 ‘사랑하기 때문에’의 템포는 일반적인 가요로서는 느린 템포지만 나는 un adieu의 템포 (molto lentamente)로 낮추고 후렴구의 템포도 크게 빨라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런 tempo의 싱크로 작업으로 셀시의 명상적이고 사색적인 분위기를 유재하의 곡으로 흡수시킬 수 있었다.
위의 인용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은유"를 음악에서의 ‘종에서 종으로’ 즉, 두 음악의 개별적 요소들이 만나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각 작품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더불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 같은 작업은 분명 음악적 언어의 ‘은유’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악보에서와 같이 un adieu의 오른손 멜로디와 왼손의 두터운 화음구조가 “사랑하기 때문에”의 코드에 맞게 변형되어 사용되었다.
2. 급반전과 발견 - 후렴구
이 곡을 작업하는 데 있어서 기술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바로 ‘후렴구’였다.
가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verse 1.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verse 2.
내 곁을 떠나가던 날 가슴에 품었던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
bridge
어제는 떠난 그대를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제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chorus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내 모든 것 드릴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verse 3
커다란 그대를 향해
작아져만 가는 나이기에
그 무슨 뜻이라 해도
조용히 따르리오
만남을 표현한 1절, 이별을 노래한 2절, 그리움을 노래한 간주 이후에 후렴에서 유재하는 그대가 ‘다시 돌아왔다’ 고 얘기한다. 그리고 돌아온 그대에게 모든 걸 드리겠다고 말한다. 얼핏 보면 연인들의 만남, 이별, 재회를 노래하는 내용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는 후렴구가 앞부분과 전혀 다른 음악적 리듬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편곡하면서 깨달았다. 그래서 아래의 악보에서 보이는 처음의 ‘낭만적 변주’ 버전에서 시작하여 포레의 인상주의적 패턴으로 수정하였다가 결국은 처음에 시도하였던 셀시의 단호한 리듬의 반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음표가 나열되는 방식과 색채 등 음악 안의 모든 매개변수는 작곡가의 무의식이 드러난 징표와도 같다. 후렴구의 갑작스러운 전개와 셀시 곡과의 깊은 유사성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유재하의 떠난 연인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작곡가는 후렴구에서 이에 대한 깊은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다. 그것이 셀시의 “a dieu”라는 외침과 “사랑하기 때문에”의 후렴구의 리듬이 일치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고, 아마 20대의 유재하가 느꼈을 절망감, 그리고 3절에서 표현되는 종교적인 깨달음에 가까운 가사의 내용을 납득하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 곡을 노래한 많은 후배 가수들 중 ‘다시 돌아온’을 ‘다시 돌아올’로 부른 이도 있는 것을 보면 후렴구가 지닌 역설적 의미는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필자는 편곡과정을 통해 노래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상상하게 되면서 이러한 발견이 새로운 가상의 스토리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구체적인 음악적 근거에서 출발하여 개연성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즉 헤어진 연인이 돌아왔다고 '착각'하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 이를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한 ‘서정시의 극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유재하가 연인과 실연하여 이 곡을 썼다는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실연의 아픔을 도리어 연인에 대한 믿음으로 치환시켜 반어적인 음악 어법으로 표현하고 이면의 심상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1, 2절의 전개 양상과 후렴의 급반전에 이르기까지 이 노래는 이미 다층적이고 복합적 의미를 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급반전과 발견’의 층위에 해당할 수 있다.
발견이란
그 말 자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무지의 상태에서 지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등장인물들이 행운의 숙명을 지녔느냐
불행의 숙명을 지녔느냐에 따라
우호관계를 맺게도 되고 적대관계를 맺게도 된다.
그런데 발견은 ‘오이디푸스’에 있어서와 같이
급반전을 수반할 때 가장 훌륭한 것이다
유재하의 노래에 있어서 급반전은 화자의 연인은 떠났음에도 떠나지 않았다고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 현실 세계를 부정함과 동시에 다른 영역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완전히 새로운 내면의 심상을 드러낸다. 화자의 기억 속에서, 떠난 연인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며 화자와 더욱 밀착된다.
필자는 앞에서 여러 영화들과 유재하의 노래들을 매치시키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적었다. 예를 들어, 영화 “ Shape of Water” 혹은 88년에 개봉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인물들 간의 엇갈린 사랑의 타이밍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희생과 부활, 영원에 관한 아름다운 영화적 메타포들은 유재하의 노래가 갖는 다층적 의미를 시각적으로 재현해 낸다. 유재하의 노래 속, 연인이 떠났음에도 그가 떠나지 않았다고 믿는 화자의 마음은 부활과 영원이라는 종교적 주제와 평범한 사랑 노래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유재하의 가요를 클래식의 맥락으로 옮겨오면서 하나의 노래 안에 숨겨져 있던 비극적 의미를 심화시키고 다층적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모색하며 짧은 노래 가사로부터 무수히 많은 스토리가 파생될 수 있음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일부 개념을 인용해 가며 살펴보았다. 또한 이 작업은 대중음악의 한 가락을 “진지한 시인은 고매한 행동과 고매한 인물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한편 “라고 쓴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처럼 보다 ‘고상한 의미’의 예술형식으로 승화시키지만,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 있어 예술 장르에 어떠한 경계도 존재하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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