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ftness
내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책을 내게 되면
그게 꼭 점자로 제작되었으면 좋겠어.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끝까지 한 줄 한 줄 더듬어서
그 책을 읽어주면 좋겠어.
그건 정말... 뭐랄까.
정말 그 사람과 접촉하는 거잖아.
from 한강 <희랍어 시간>
‘부드러움’이란 본래 촉각적 감각에 속하지만, 많은 예술작품은 이를 청각이나 시각적 경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이는 감각 경험이 단일한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복합적이며 심층적인 지각의 층위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로스코 채플》에서는 다양한 음악적 매개변수의 통제를 통해 소리의 질감을 부드러움으로 전환하며, 이를 통해 고요한 음색의 질감을 만들어낸다. 특히 극도로 절제된 다이내믹의 사용과 어택을 최소화한 연주법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로스코 채플》에서 약음기를 낀 비올라 연주, 모음 ‘n’으로만 불리우는 합창, 그리고 세밀한 다이내믹 지시는 모두 이러한 질감을 이루는 요소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아래 악보의 29마디에서는 극도로 낮은 음량으로 합창이 조심스럽게 연주되며, 이어지는 32–33마디에서는 페달을 사용한 비브라폰과 약음기를 낀 비올라의 프레이즈가 삽입된다. 이윽고 팀파니의 여린 트레몰로와 합창은 비브라폰의 사라져가는 울림 속에서 소리의 여백을 섬세하게 채운다.
이처럼 미세한 음향과 긴 침묵이 교차하는 구성은 소리의 발화 지점이 멀리 있다는 인상을 주며, 소리의 소멸(decay) 과정에 집중하도록 이끈다. 즉, 느린 템포와 여백은, 사라진 소리가 남긴 잔향을 청자와 소리 사이의 물리적 거리로 지각하게 만듦으로써 ‘부드러움’이라는 촉각적 감각을 이룬다.
펠드먼은 이러한 음향적 특성을 ‘출처 없는 소리’(sourceless sound)라 부르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실 우리가 듣는 것은
소리 그 자체라기보다
어택(attack)이다.
그러나 소멸(decay)이,
떠나가며 사라지는 풍경이
소리가 우리의 청각 속에 자리잡는 과정을 이룬다.
즉 소리는
다가오기보다는
떠나가는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이러한 언급은 소리가 사라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감각적 실체에 주목하는 펠드먼의 인식을 보여주며, 실체와 소멸 사이에 존재하는 역설적 긴장 관계를 암시한다. 사라져가는 감각의 경계에서 오히려 인간의 지각은 더욱 활성화되며, 생생한 체험의 축을 형성하게 된다.
<로스코 채플>에서는 가사가 제거된 합창과 저음역 타악기로 구성된 음향이 소리의 출처를 명확히 인지하기 어렵게 만들며, 이는 지각의 초점을 음원에서 공간으로 전이시킨다. 이때 소리가 사라지면서 드러나는 여백은 공간의 규모를 실제보다 확장된 것으로 경험하게 하고, 동시에 희미한 빛과 같은 감각적 인상을 형성한다.
이는 마크 로스코가 채플 연작의 설치에서 낮은 조도를 선호했던 방식과도 상응한다. 채플 연작의 끝을 알 수 없는 낮은 채도의 색면은 캔버스가 관람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으로 천천히 부상한다. 색채의 소멸과 빛의 느린 부상이 이루어내는 희미한 감각이 펠드먼의《로스코 채플》이 구현하는 음향의 감각적 구조과 긴밀히 맞닿는다.
이처럼 감각과 인식이 동시에 작동하는 복합적 지각 과정 속에 관람자는 소멸과 생성이 교차하는 느린 흐름을 인식하게 되며, 이 경계적 순간의 미세한 떨림이 ‘부드러움’이라는 감각적 사고의 구조를 형성한다.
https://youtu.be/uzjYQuDPi9Q?si=G7G6fNUNw9VSJIvp
1. 이 장에서 말하는 ‘부드러움’은 절대적인 물리량이 아니라, 지각의 층위에서 형성되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감각 경험을 가리킨다.《로스코 채플》의 음색이 ‘부드럽다’고 인식되는 방식은 개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다른 작품들과의 비교 속에서 드러나는 상대적 특성이다. 실제로 펠드먼의 다른 조용한 작품들과 비교하면,《로스코 채플》의 음량은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본 논의는《로스코 채플》이 어떤 작품인가를 객관적으로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고요함’의 의미를 탐구하고, 그 경험이 청자의 주관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 해석적 서술임을 밝힌다.
2. 《로스코 채플》의 고요함을 이루는 ‘부드러움’은 그 내부에 세분화된 박자 구조와 미세한 리듬을 내포하며, 연주자에게 지속적인 주의를 요구하는 움직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로 인해 연주자는 매 순간 음의 지속과 소멸, 강약의 균형, 음색의 질감을 섬세하게 조정해야 하며, 이러한 감각적 통제는 높은 수준의 집중과 주의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펠드먼의 음악은 전통적인 비르투오시티와는 다른 차원의 기교를 요구하는 음악이라 할 수 있다.
3.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환상곡」 도입부는 두 명의 피아니스트가 만들어내는 복합적인 리듬과 질감 위에 고요한 한숨과 같은 음형이 놓이며 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이러한 음향적 인상은 펠드먼 음악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질감과 유사한 감각을 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