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y and Projenction
화성은 조명(illumination)이요,
오브제(object)의 전시이자
그 반영이다.
히브리 선율은 단순하고 친숙한 오음계 선율로서, 그 내부에 조성적 성격을 내포한다. 이는《로스코 채플》을 작곡하던 시기, 펠드먼이 전통적 기보법을 통해 선율과 화성 등 서양 고전 어법을 간접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사실과 맞물리며, 그가 드물게 사용한 조성의 의미를 가늠하게 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 가운데 조성적 요소를 포함한 곡들은, 근·현대 음악에서 시도된 ‘확장된 조성’에 가까운 양상을 띠며, 기억과 회고의 정서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본 장에서는《로스코 채플》이외의 몇몇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경향을 검토함으로써, 히브리 선율이 지니는 의미와 맥락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펠드먼은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 음악《매리 앤의 주제》(Theme for Mary Ann, 1961)에서 조성적 형태를 갖춘 음악을 시도한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조성의 의미는 영화 음악이라는 장르의 특수성과의 연관 속에서 해석될 수 있다. 영화가 빛을 통해 이미지를 투사하는 예술 형식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곡에 사용된 조성 어법은 펠드먼에게 문학적이며 상징적인 함의를 지니는 요소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조성 언어는 내면에서 떠오르는 감각과 정서를 음악적 구조 속에 투영하는 하나의 시각적 장치로 기능했을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스크린 위에 빛이 투사되어 내러티브가 형성되듯, 펠드먼의 음악 속 조성 역시 기능적 조성 위에 덧입혀진 기억과 이미지의 층위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에릭 사티의《짐노페디》(Gymnopédies)를 연상시키는 느린 3박자의 곡인《매리 앤의 주제》는, 현악 4중주, 호른, 첼레스타에 의해 E 도리안 음계에 기반한 조성적 흐름을 드러낸다. 이 곡에서는 간헐적으로 삽입되는 불협화음—호른의 B♭과 C—이 미묘한 긴장을 형성하며, 심리적 공회전 상태에 가까운 불안감을 환기시킨다. 영화 속 극도로 잔혹한 장면에 배치된 고요한 음악은, 장면의 폭력성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관조적인 정서를 형성한다.
https://youtu.be/RJ0VZU9pwEI?si=xfiilvlsyX-6EwoZ
조성 어법의 사용은 이후《로스코 채플》을 작곡하기 1년 전이자 마크 로스코가 사망한 해인 1970년에 완성된《마담 프레스 90세에 죽다》(Madame Press Died Last Week at Ninety)에 이르러, 비록 덜 명확한 형태이지만 더 확대된 편성으로 시도된다. 이 작품은 신문 기사와 같은 건조한 제목과 달리, 선법적 화성 흐름을 바탕으로 형성된 두터운 수직적 음향을 통해 서정성을 드러낸다. 특히 매우 짧은 모티브의 강박적 반복(총 81회)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결과, 펠드먼 특유의 반복적 모티브와 조성적 어법이 혼재된 양식의 한 예를 보여준다.
펠드먼은 자신의 첫 음악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담은 이 곡에서, 수직적 화성이 만들어내는 풍부한 색채를 통해 추상적 음향 속에 스며드는 개인적 기억의 의미—곧 조성 어법의 사용이 지니는 정서적·상징적 기능—를 드러낸다. 이러한 작법은 로스코에 대한 기억과 정서를 근간에 두고 있는 《로스코 채플》의 히브리 선율이 지니는 내적 의미와도 상통한다.
특히 히브리 선율은 작품의 종결부에서 하나의 하이라이트처럼 제시되며,《마담 프레스 90세에 죽다》의 화성적 울림보다 더욱 극적인 방식으로 등장한다. 이 선율은 조성적 기능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작품 전체의 흐름을 수렴하는 지점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수렴의 방식은 곡의 도입 모티브와 이후 매우 긴 오스티나토 구간과의 연관성 속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아래 악보에서 비브라폰의 G–B–A–C 반복이 형성하는 오스티나토는 비올라 솔로의 E 에올리안 선율과 함께 G음을 중심으로 한 온음계적 조성 영역을 형성한다. 이 오스티나토는 아래에서 보이듯 곡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팀파니의 B–D 3도 진행을 환기시키고, 135마디부터 약 2분간 지속되는 D–B 반복 동기와도 긴밀히 연결된다. 이 반복적 회귀는《로스코 채플》전체에서 B와 D가 주요한 ‘기억의 음’으로 기능하며, 종결부의 G–A–C와 결합하여 하나의 조성적 고리를 이루게 됨을 보여준다.
히브리 선율은 표면적으로는 곡 전반의 추상적 음향과 대립적으로 인식되지만, 오히려 작품 내부에 잠재해 있던 조성적 기억—B·D 모티브의 지속적인 환기를 통해 형성된 장—이 G음을 중심으로 응결되어 최종적으로 드러난 결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히브리 선율은 실제로 곡 전체를 관통해온 조성적 투사의 귀결점으로 기능한다.
이처럼 서양 음악의 관습적 언어가 펠드먼 특유의 추상적인 음향 구조 속에 스며드는 양상은, 선법을 포함한 ‘조성’이라는 틀이 감정과 기억을 투사하는 하나의 ‘표면’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펠드먼의 전반적인 무조적 작법과 비교할 때, 이러한 어법은 분명 이례적이며 그 낯섦이 오히려 생생한 물성을 띠며 청자의 감각을 감싼다, 이러한 의외성과 친숙함이 결합된 독특한 외연이《로스코 채플》의 ‘환영적 표면’(illusive surface)을 이룬다.
1. 사티의 메모 중 일부. Robert Orledge, Satie the Composer (Cambridge: Cambridge UP, 1990), 68–69
2. 1961년 개봉한 영화《Something Wild》의 음악을 의뢰받은 펠드먼은, 여주인공이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의 배경 음악으로 첼레스타가 등장하는 느린 3박자의 조성 음악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해당 장면에 삽입된 음악에 대해 감독이 강한 불만을 제기하면서 계약은 철회되었고, 이 곡은 결국 영화에 사용되지 않았다. 이후 이 작품은 Morton Feldman’s Film Music 앨범을 위해 새롭게 녹음되며, 펠드먼의 조성적 작법을 엿볼 수 있는 드문 사례로 남게 되었다. 동영상은 필자가 본 곡을 가야금, 플룻, 건반을 위한 곡으로 편곡하여 무성영화와 함께 상영한 공연의 영상 자료이다.
3. 펠드먼은 “나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를테면 서양 문명의 음악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고백하며, 기독교적 전통 위에서 형성된 서양 음악과 자신 사이의 간극을 자각했다. 이러한 ‘외부자’의 감각은 그에게 조성을 본래적으로 낯선 언어로 체감하게 했으며, 이와 같은 자각이《로스코 채플》의 히브리 선율 도입 배경으로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히브리 선율은 그에게 유대인 정체성과 결부된 일종의 모국어인 동시에, 서양 전통 음악의 형식과 연결된 낯선 언어라는 점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Heinz-Klaus Metzger, “Conversation with Morton Feldman and Earle Brown,” liner notes for Music Before Revolution, EMI Electrola, IC 16528954/957 (1972), accessed via Scrib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