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lections in Melody
로스코 예배당 앞마당의 수변 공간에는 바넷 뉴먼의《부러진 오벨리스크》(Broken Obelisk)가 설치되어 있다. 수면에 비친 오벨리스크의 반영은 실재와 환영을 동시에 드러내며, 관람자로 하여금 두 영역의 경계를 재인식하게 한다. 이러한 공간적 장치는《로스코 채플》종결부의 히브리 선율이 펠드먼에게 단순한 과거의 회상을 넘어, 반영을 통한 각성의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을 시각적으로 암시한다. 다시 말해, 잠잠한 수면이 오벨리스크의 실재와 반영을 함께 비추듯, 오음계적 선율 역시 고요한 음향의 표면 위에 떠올라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성찰의 층위로 전환됨을 보여준다.
반복되는 선율은 구조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보다
하나의 ‘기억’처럼 돌아올 뿐이다.
상황은 기대와 그 실현 사이에서 반복된다.
그것은 마치 꿈과 같아서,
우리는 꿈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끝’이 아닌 ‘깨어남’이라는 표현은, 고요 속에서 소환된 선율이 과거의 반영에 머물지 않고 각성의 기능을 수행함을 시사한다. 이 선율은 완료된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와의 조우를 가능하게 하는 ‘현재진행형의 과거’로 작동한다. 이러한 특성은《로스코 채플》을 전후한 작품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동일한 선율의 의미를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로스코 채플》과 같은 해에 작곡된《나는 퓌르스텐베르크 거리에서 하이네를 만났다》(I Met Heine on the Rue Fürstenberg)에서는 작품 말미에《내 인생의 비올라》의 선율이 다시 호출되며, 반복되는 선율이 지니는 의미를 환기시킨다. 펠드먼은 이 작품의 창작 과정을 회고하며 다음와 같이 쓴다. “나는 이 연속성, 내가 짊어진 이 무언가를 배신할 수 없다는 감정을 갖는다. 그것은 곧 역사의 짐이다.”
이러한 언급은 특정 선율, 혹은 동일한 선율의 반복적 등장이 자전적 기억을 넘어, 공동체의 기억으로서의 역사를 마주하게 하는 지각적 매개로 기능함을 시사한다. 기억의 환영이자 환상(phantom)을 구체화하는 장치로서 선율은, 실재와 비실재의 경계를 드러내는 ‘보이는 허상’으로 작동한다.
유대교 찬송가 형식의 히브리 선율은 로스코 예배당이라는 상징적 공간을 넘어, 청자를 유대교 회당과 역사적 기억의 층위로 이끈다. 반복적으로 되돌아오는 꿈 혹은 기억의 선율은 환영처럼 출현하지만, 수면 위에 비친 오벨리스크와 같이 ‘멈추어 서 있는 환영’(幻影, phantom)으로서 청자의 인식을 시공간의 경계 너머로 이끌며, 음악적 체험을 반영과 각성의 경험으로 확장시킨다.
https://youtu.be/QcSXo5BiJ58?si=l4ijzX5CfmlvRa3a
1. 바넷 뉴먼의《부러진 오벨리스크》(Broken Obelisk)는 태양신을 상징하는 고대 이집트의 조형물 오벨리스크의 형태를 거꾸로 배치함으로써, 권력과 질서를 전복적으로 재해석한 조형물이다. 이 작품은 총 세 점이 제작되었으며, 그중 하나가 드 메닐 부부에 의해 구입되어 로스코 예배당 앞에 설치되었다. Susan J. Barnes, The Rothko Chapel, 90-96.
2. 인용문은 펠드먼이《내 인생의 비올라》연작에 대해 남긴 설명으로, 동일한 제목을 지닌 연작들 가운데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선율이 지니는 내재적 의미를 해명한다. Feldman, Give My Regards, 91.
3. ‘연속성’ 혹은 ‘역사의 짐’이라는 표현은, 하이네로 상징되는, 고향을 떠나 배회하는 유대인적 정체성뿐 아니라, 20세기 최대의 비극 가운데 하나인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라는 집단적 기억까지 함께 호출한다. 이는《로스코 채플》이 놓인 역사적·공간적 맥락과, 이를 둘러싼 예술가들의 배경이 개인적 기억을 넘어 집단적 트라우마의 층위와 접속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홀로코스트와 펠드먼의 음악 사이의 접점은 이미 여러 비평적 논의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특별히 본 논문은 마크 갓프리(Mark Godfrey)의 Abstraction and the Holocaust를 이에 관한 하나의 간접적 참고 지점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 저서는 펠드먼의 음악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추상 너머의 구체성’이라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추상 예술과 유대인 예술가들의 관계를 아카이브 연구와 이론적 분석을 결합하여 심도 있게 탐구한다. 특히 로스코 예배당의 한 면을 이루는 바넷 뉴먼의 연작 The Stations of the Cross: Lema Sabachthani (1966)을 분석하며,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추상적 형식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호출되거나 암시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추상’이 지니는 미학적·윤리적 효과를 탐구한다. Mark Godfrey, Abstraction and the Holocaust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7), 51-77; 인용문의 출처는 Feldman, Give My Regards, 121.
4. “파리의 어느 이른 아침, 나는 들라크루아의 아틀리에가 있는 좌안의 작은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곳은 한 세기 전과 다름없이 그대로였다. 나는 그의 일기를 읽었는데, 거기엔 쇼팽과 함께 마차를 타고, 독일에서 망명 온 시인 하이네가 들르곤 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거리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모퉁이에서 하이네를 보았다. 그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거의 내 앞에 이르렀다. 나는 그 순간, 그에게—유대인 망명자에게—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나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나는 퓌르스텐베르크 거리에서 하이네를 만났다》를 썼다. 그들은 죽지 않았다. 그들은 내 곁에 있다. 내가 가장 강하게 느끼는 것은 대중에 대한 것도,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한 것도 아니다.” 파리에서의 펠드먼 자신의 경험을 기술한 이러한 기록은, 상상 속에서 마주한 역사적 인물과의 조우가 음악 속에서 하나의 선율적 사건으로 전이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Feldman, Give My Regards, 12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