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20년 7월

by 이점선


2020.7.7. 월요일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제프 다이어>를 펼쳤다. 파리에 대한 기억은 2013년 1월 파리여행 중 지하철 냄새에서 시작한다. 몽마르뜨 언덕 아래 방을 구하고 일주일을 머물면서 프랑스 평범한 일상을 함께 했던 기억은 잘 저장되어져 있다.

2020.7.8. 화요일

12쪽 ‘방금 도착한 누군가에게 그 시점이 최악이다.’ 익숙한 무엇에서 떠나왔을 때 도착한 그곳은 최악일 수 있다. 시집온 옛날 처녀. 외진 성벽의 요술학교에 버려진 고아, 외딴 섬에 버려진 여자

난 김언희 선생님의 시집 <GG>에 나온 작가와 이름들에 매달려보기로 했다. 늦은 봄에 30여권의 책을 구입했다. 대학원 논문 발표를 준비하느라 책을 읽지 못했다. <GG>의 첫 시에 나오는 ‘불다 불다 내 머리통까지/ 불어 날렸어’가 제프 다이어에서 인용되었다. 난 그 구절을 찾아 제프 다이어의 책을 읽을 것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로 난 숲을 얼마가 오랬동안 걸어다닐 것인지 모른다. 바위에 앉아 쉴 때는 논문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제프 다이어의 숲에는 어떤 나무가 있을지, 어떤 풀꽃이 피어있을지 모른 다. 아직은 미지의 세계다. 숲을 헤맬 시간은 충분하다. 다만 내가 주저앉아 다른 곳을 바랄 볼 뿐이다. 지난 여름 ‘닥터 지바고’를 만난 시간은 얼마나 행복했던지 그렇게 집중해서 누군가를 만난 적이 없었다. ‘닥터 지바고’나 ‘라라’만큼 좋아할 인물을 만났으면 좋겠다.

반감기

김언희

나는 불어젖혔어, 사랑을, 색스폰처럼

물어젖혔지, 불멸의

색스폰을

온몸의 뼈다귀들이 필라멘트처럼 빛을 낼 때까지

불어젖혔어

당신을

불다불다 내 머리통까지

불어 날렸아*

사랑은 방사성

폐기 물질

반감기가 오기까지

45억년이

걸리지

*제프 다이어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서 시인들은 비록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시어들을 서로 나누어 먹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잘 봐. 내 시, 2014년에 발간은 했지만 이미 10여년 전에 쓴 시들이야. 내가 쓴 시에 이미‘필라멘트 빛’, ‘45억년이 걸리지’라는 글귀를 썼거든.

내 시를 한 번 볼래? 아 너무 뻔한 수법이라고. 내 시를 은근슬쩍 끼워 넣을려고 한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나팔꽃’이라는 시에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하나가 필요하다/ 한 개의 필라멘트가 깜박깜박한다’, 아 그런데 내 기억에 오류가 있었네. ‘검은 열매를 먹는 새’에서 ‘5천년이 더 걸린다고 했잖아’ 라고 썼다. 그리고 ‘캔버스’라는 시에서 ‘1억 5천만년동안’이라는 표현을 썼다. 숫자는 아무나 쓸 수 있으니까 그렇대도 아무래도 내겐 너문 익숙한 문장이다. ‘나방’에서는 ‘1억 이천만년전의 그 자세로 누워서’ 라고 썼다.

‘졌다’라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은 더 오래되었고 나는 44억년이나 어리다. 그보다 더 어릴 수도 있다. 선생님께서 만약에 1000억년 전의 그 시대를 꺼집어낸다면 지구상에는 당할 자가 없다. 이 생각은 천년된 은행나무침대를 우연이 발견해서 내 것으로 만든 것처럼 재미있다. 어떤 위험한 역사가 딸려올지 모르는 은행나무 침대 하나를 끌고서 난 어디론가로 출발한다.

역시 안개다. 안개가 걷히지 않은 새벽 숲길로, 구부정한 등을 펴지도 않은 채, 표정없이

그런데 왜 자꾸 웃음이 나지?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

13쪽에는 ‘그 안에 마치 빙하에 묻힌 천년된 시체처럼’이라는 문장이 자연스럽게 놓여 있다. 이 소설 속에 45억년이라는 비밀이 있을 것 같다,

그 안은 환기 되지 않는 곳이고 빨래가 절대 마르지 않는 공간이고 키에슬로프ㅡ스키 감독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을 본 곳이다.

그는 엄청난 고뇌에 빠져있지만 어쨌든 계속 나아가고 있다. 그저 살아남았다는 그 사실 자체가 형벌을 승리로 만들어 준다.


2020. 07.08. 수요일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더위가 등을 뒤덮는다. 난 옥수수 한 개를 먹고 있고 에어프라이기에는 감자를 익히는 기계음이 동일한 소리를 내면서 돌고 있다. 감자를 깎아서 삶아먹어봐야 겠다. 하얀 전분으로 싸인 뜨거운 삶은 감자는 맛을 말하기가 그렇다. 당을 넣은 단맛과 혀 천장을 데울 듯한 뜨거움이 뜨거운 감자의 전부이다. 뜨거울 때는 거의 감자의 냄새를 상실한다. 이제야 깨닫는다. 갓 솥에서 꺼낸 뜨거운 감자는 감자 냄새가 안 나기 때문에 맛있다. 일에 대하나 열정이 식으면 누구나 자기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식은 감자에서는 감자 냄새가 진해진다. 일을 도모할 때 일에 대한 통찰보다 자기의 욕망과 자기의 위치나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려고 할 때 식은 감자 냄새가 난다. 식은 감자를 밀어내듯 그런 사람은 밀어낼 수밖에 없다.

주인공 루터는 파리에서 알랭타네의 영화<백색도시>를 보았다. 이 영화가 실제 상영된 영화인지 확인해 봐야겠다.

32쪽 저녁에 그는 영화 <밀회>를 보러갔다. 그건 전통이었다. 생일날 어떤 식으로든 <밀회>를 보는 일. 보통은 비디오에 만족해야 했던 루크로서는, 스크린- 비록 작은 스크린이었지만 -에서 그 영화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생일을 홀로 보냈다는 사실에 대한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그 영화의 모든 면이 좋았다.


2020년 07.09 목요일

34쪽 누군가의 삶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믿는 것은 분명 불가능하다. 한 개인의 유전자 안에, DNA안에 어떤 계획이 들어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각각 사람들은 하나의 약속을 지닌 채 태어나고 그 약속이 적절한 조건을 만나면 눈에 띄게 전면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이룬 것들을 반추하면서 느끼는 실망, 혹은 덧없음은 어쩌면 그가 버리거나 피해왔던, 하지만 완전히 입을 다물게 하지는 못했던 어떤 희미한 반향일지도 모른다.

어떤 삶의 양식은 지금은 희미해진 그 최초의 청사진에 더 가까이 닥가갈 수 있게 해준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실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2020년 07.10. 금요일

다시 잠들었다가 비소리에 깬다. 새벽에 북쪽 창문을 다 열었는데 비가 들어왔다. 현미를 담아놓은 푸대에 물이 묻었으나 방수가 되어 쌀은 물에 젖지 않았다. 저 현미도 벌레가 슬지 모른다. 찹쌀에 쌀벌레가 생겨 베란다로 옯겨놓았다. 펼치고 말려야 하는데 공간이 없다, 점점 생활 할 수 없도록 베란다도 짐으로 메워져 가고 있다.

이 방엔 책과 다른 생필품으로 채워져 가고 있다. 겨우 드나들고 컴퓨터에 앉아 일을 할 수있다. 그럼에도 아침이면 맑은 공기가 들어오고 새소리가 들리는 집이다. 오래된 묵은 성과 같고 비울 수 없는 성은 감옥과 같다. 포탄에 맞고도 굴뚝에 연기를 피워올리며 봄을 맞이하던 프랑크푸르트 성과 같다. 이미 폐허이면서 밥냄새를 풍기고 창을 연다. 그래서 이 집은 아직 살아있다.

‘시작은 그렇게 파리의 어느 골목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일고 읽는 소 제목에서 시작되었다. 시작했으니 끝을 내야한다. 골목에 들어섰으니 골목의 끝에까지 가 보아야 한다. 출구가 없는 그림일지 모르지만 끝에 가서야 알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는가.


2020.07.12. 일요일

74쪽 이 대화처럼 흐르는

78쪽 다른 사람이 되려고요. 적어도좀 더 사람다워지려고

112쪽 그는 바흐의 ‘평균률 건반곡’을 집어 들었다.

20220.07.13 월요일

148쪽 요리는 문명 그렇게 자신을 몰입시키는 활동 중 하나였다.

새벽 1시에 내리던 비는 새벽을 거쳐 아침 6시까지 이어 내리고 있다.

일하러 가기 위해 8시에는 집을 나서야 하지만 아직 책을 읽을 시간은 충분하다.

유산균과 고혈압 약을 먹고 오랜 만에 커피를 탔다. 비소리 때문이다. 다양도실 배수구로 빠져 나가는 물소리가 마치 숲속의 좁은 계곡을 연상케 한다. 잠을 깨면서 아이들에게 가르칠 어휘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숙제처럼 만나야 할 사람들과 처리해야 할 일들을 짚ㅇ 보았다. 문태고모는 방아를 베었다고 전화를 하셨다. 시간을 만들어 식사라도 해야겠다. 진숙이 어머니와 문태고모, 불루베리농장의 젖큰 할머니 실은 그 할머니는 어머니와 먼 친척벌이다. 이제 그 동내에서 살아남은 1세대들이다. 홍아아제가 돌아가시기 전에 사진이라도 찍어두었으면 아쉬움이 없을 건데 생각만 해도 스스로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집안에 분란이 일었지만 시골집을 둘째 아들에게 넘겨주신 진숙이 어머니 판단이 옳을지도 모른다. 일요일마다 나와 어머니를 돌본다. 식사하고 하고 청소도 하고 마주보고 웃기도 할 것이다. 장자에게 집을 물려주지 않았다고 각각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물려주는 사람 의지니까 옆에서 뭐라 할 수는 없는 문제다.

164쪽 이 세상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만이 갈 수 있는 길이 있단 말이지. 그ㅡ길이 어디로 이어지냐고? 묻지 말고 그냥 가.


2020.07.15. 수요일

143쪽 지금은 나 자신이 다른 중심을 향해 가고 있는 것같은 느낌이 들거든.


2020.07.16. 목요일

330쪽

그 책은 우울했다. 결국 우리 모두는 그런 모습이었고, 또한 그런 모습이 될 것이라는 생각. 말라비틀어진 스펀지 같은 덩어리들, 열 개중 아홉 개는 결국 폐기처분될 운명인 것들.

이 책도 막바지로 다가간다. 메시지가 있거나 철학적이거나 관념적인 표현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실 묘사를 아주 세밀하게 하였다.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주인공들의 피부 어느 부위에 털이 나 있고 항문의 어느 쪽으로 손가락이 들어가는지, 축구를 하면서 힐끔힐끔 바라볼 때 온 ㅡ순간 남녀 주인공의 눈길이 서로 스쳐가는지 묘사를 하였다. 정리가 안 된 아파트를 묘사할 때는 흐트러진 짐들과 부엌을 오갈 때의 시선의 혼돈까지 읽을 수 있다.

책을 접기로 했다. 옮긴이의 말처럼 지금을 부정하지 않고 그 시기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법을 기억해야 겠다.

또 아주 우울한 하루가 시작된다. 지금은 7시 21분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해야한다. 퇴근 할 때 제프 다이어의 다른 소설을 챙겨야 한다. 김언희 선생님께서 인용한 ‘불다 불다 내 머리통까지/ 불어 날렸어’를 찾을 때까지 읽어야 한다.


2020.07.18.

17일 하루는 잃어버렸다. 저녁 식사도 갑자기 약속이 잡혔고 마치 나는 빠져도 되는 것처럼 자기 이야기를 해 대는 상대방 때문에 몸속 세포들이 모두 굳어버린 듯했다. 염분이 많은 어탕이 문제긴 했고 커피 집에서 먹은 찐빵도 좋아하는 향이 아니었다. 오늘 점심때도 찐빵이 나왔는데 두 개나 먹었다. 약간 공포스런 몸무게로 변해 간다.

제프 다이어의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를 덮었다. 두 번째로는 파스칼 키나르의 소설<로마의 테라스>를 집었다. 철학가이면서 클래식 악기에 능한 그는 내가 좋아하는 천재중한 사람이다 오늘부터 그를 찾기로 한다. 다행히 <떠도는 그림자들>도 있다. 레몬술을 마시고 싶다. 속의 갈증은 오늘 저녁 백숙을 먹었기 때문이다. 외식을 하면 속의 염분이 늘 갈증을 일으킨다. 레몬수를 만들어야겠다. 냉장고에 넣어 두고 시원하게 마셔야겠다.

공기는 청량하고 조용하다. 딸의 방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내가 듣는 클래식이 아니지만 늘흥미롭다. 나는 주로 조용하고 차분한 음악을 듣는다. 첼로나 바순 바이얼린 연주곡을 좋아한다. 10월이 되면 첼로의 저음이 가슴 저 밑바닥에 가 닿을 때가 있다. 선율에 몸을 싣는 다는 말은 바닥에 닿았던 저음이 몸을 타고 올라오면서 몸을 건드리기 때문에 몸의 모든 세포가 살아난다. 그것을 느낀다는 건 음악에 몸을 싣는 것이다.

새벽 한시다. 딸은 팝송을 듣고 있다. 산책을 나간다고 했지만 그 산책 속에는 잠깐 동안의 데이트도 들어 있을 것이다. 아니어도 괜찮다. 내가 이렇게 쓴다고 해서 누구에게 손해를 끼치는 건 아니다. 장투나 의심으로 감정 소비를 간혹 하지만 난 정말 냉정하기 그지 없다. 감정이 없다 딸은 감정이 없다는 문제로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고 싶어한다. 그건 나도 마친가지 의문이었다. 왜 기쁨이 없을까? 언제부터인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걸 알았다. 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마음의 노화현상처럼 생각했다. 바빠서 생각할 겨를 도 없이 지나온 세울이지만 감정이 없다는 생각은 많이 했다. 언제부터일까 자신을 거슬러 올라 보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중학생이 되기 이전이었던 것 같다. 감명이 없다. 표현도 약하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것밖에 못 느끼니까 그만큼만 표현하는 것이다. 왜 매마랐을까에 대한 분석은 공부가 필요하다. 분명 무언가가 가로막았을 것이다. 그 지점을 찾아 뚫거나 풀어주는 것이 정신과 치료다.

난 파리에서 로마로 이동할 것이다.

금방 눈이 피로해 지고 잠이 쏟아진다. 누우러 가야된다. 바깥에서 자다가 심한 목감기에 걸렸다. 난 따뜻하게 자야 한다. 잠들기 위해 뛰어간다. 다시 머리가 환해질지 모른다. 머리까지 맑게 해줄 레몬수가 필요하다. 갈증을 풀고 싶다.

오전에는 8시부터 11시까지 여적암에서 청소를 하고 풀을 메었다. ‘쇠뜨기같이 질 긴’이란 관용어가 있다. 쇠뜨기는 봄부터 가을까지 줄기차게 오른다. 손이 가지 않으면 어느새 짙은 연둣빛 쇠뜨기가 마당을 덮고 만다. 풀은 정말 어느 곳이든 무섭게 돋아난다. 틈이 날 때마다 스님께서 캐시고 우리도 가끔 풀을 메야 한다. 단순하기 호미로 풀을 메는 일은 피곤하기는 하지만 정신과 몸을 맑게 해 준다.

점심때는 시마다에서 회장님과 연화장어니, 스님과 중국어 선생님과 소바와 야채 튀김을 먹었다. 저녁에도 자유시장에서 명태찜과 밥을 먹었다. 회장님은 손자 백일 잔치에 가시고 민이언니, 손선생, 윤선생님이 같이 식사를 했다. 한 달에 한번 씩 모이는 모임이다.

드디어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을 편다. <떠도는 그림자들>책도 있다. 주말에는 한 권이라고 읽어야겠다.

시계가 1시 11분을 가리킨다. 이제 7월 19일이다. 하루의 수레바퀴는 순식간에 여기로 데려다 놓았다. 송의경 옭김의 책을 편다.

7쪽 책을 읽는 사람도 구석에서 사는 거네. 왜 파스칼은 이렇게 생각했을까?

키냐르는 이렇게 생각했다/혹은 말했다

“절망에 바진 사람들은 구석에서 살아가는 법일세. 사라에 빠진 사람들은 모두 구석에서 살아가지. CORDF 읽는 사람도 구석에서 사는 거네. 절망한 자들은 숨을 죽이고, 누구에게 말을 하거나 누구의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마치 벽에 그려진 사람처럼 ㄹ공간에 ㅇ달라붙어 살아가는 거야.”

59쪽 음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비속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매우 섬세한 기법으로 그리는 화가들의 유파에 속했다. 이를테면 거지, 농사꾼, 개흙 체취꾼, 그리고 대합류나 쌍각조개. 게, 반점이 있는 농어를 파는 어물 장사꾼, 신발을 벗는 젊은 여자, 옷을 거의 거리지 않은 채 편지를 읽거나 사랑을 꿈꾸는 젊은 여자, 시트를 다림질하는 하녀, 익었거나 혹은 곰팡이가 슬기 시작하거나 가을을 불러오는 모든 과일들, 음식 찌꺼기, 술잔치, 흡연실, 노름꾼,양은 주발을 핥는 고양이, 장님과 그 동반자, 누가 엿보는 것도 모르는 채 다양한 체위로 몸을 섞는 연인들, 새끼에게 젖을무린느 어미, 명상하는 철학자, 목매달려 죽은 연인들,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 명상하는 철학자, 목매달려 죽은 사람, 촛불, 사물들의 음영, 오줌 누는 사람, 똥 누는 사람, 늙은이, 죽은 사람의 얼굴, 되새기질하거나 잠이 든 짐스들 말이다.

1991년알랭 코르노 감독 이세상의 모든 아침


2020년 7월 21일 화요일

새벽 2시 22분이다. 다양도실 배관으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또렷하다. 창을 열면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있다. 실내는 습도가 높다.

<로마의 테라스>는 판화가 이야기다. 소설 전개가 간략한 위인전 같다. 감정의 해석이라든지 관념적 내용이 전혀 없다. 보고서처럼 이력이 전개된다. <파리에서 널 사랑했을 때>와는 다르다. <파리에서 널 사랑했을 때>가 떨어진 밥풀까지도 묘사해 내는 문체였다면 이번 소설은 간단하게 짚고 넘어간다. 마치 주인공 믐므씨의 일생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것 같다.

김언희 선생님은<GG>에 나온 시 또 하나의 고:독-before에서 ‘가지 못했을 수도 있는 곳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란 절이 있다. 파스칼 케냐르에서 인용했다. 어느 책인지 찾고 싶었다.

이 순간 그런 짓이 꼭 필요한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128쪽 어떤 나이가 되면 인간은 삶이 아닌 시간과 대면하네.

2시 57분이 되었을 때 몸에서 열이 나고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옮긴이의 말을 읽고서야 이해기되었다. 우선 난 자야한다. 아침까지. 잠들 수 있으면.

그래서 방에서 꿈까지 꾸면서 자고 일어나 일을 하고 왔다.

파스칼 키냐르에 대한 궁금증이 늘어난다. 소설 형식을 파괴한 소설, 대중의 상식에 돌을 던진 소설이다. 그래서 나도 왜? 라는 궁금증을 가졌나보다. 그러면 궁금증을 풀어봐야겠지. 우선은 읽어야겠다.

163 아름다움은 일체의 기교가 배제된 극도로 예민한 감수성이 강렬하게 표출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솟아오른다. 그곳에서 단순히 ‘문체’가 아닌, 육체의(작품)에 깃든 영혼과도 같은 한 목소리가 예리한 칼처럼 느닷없이 우리의 가슴을 겨눈다. “『르 몽드』지가 『로마의 테라스』는 『시학Poetics』이 시에 부여한 영역을 단번에 획득하여 점령한다”라고 말한 것도 그런 백락에서이다.

아마도 <로마의 테라스>를 다시 읽어야할 것 같다. 성 둘레를 둘러보고 온 것과 같다. 2002년 ‘콩쿠르상’ <떠도는 그림자들>을 읽는다. <빌라 아알리아>도 있다. 세 번째 책 <떠도는 그림자들>을 펼친다. 동시에 덮는다.

2020년 7월 22일

떠도는 그림자를 읽기 시작했다. 그림자들이 많다. 세상을 피해 철학과 신념을 지키고 글을 쓴 사람들을 모았다. 소설이기 보다는 기록이다. 철저하게 감상을 배제한 문장이다. 식욕 대신 글을 쓰는 그림자들을 찾아내는 키냐르의 소설은 실존인물과 상상인물의 혼합이다. 하지만 거의 실존 인물이고 실존했던 철학이다.

이 책을 필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필사는 어렵다. 시간을 먹어야 한다. 허리는 더 굽어야 하고 오른쪽 손마디는 군살로 굳어가야 한다. 김언희 선생님의 <GG>를 필사 하겠다고 했지만 시작도 안 했다. 그래도 이 구절만은 바로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출근 시간이 다가오지만 쓰야겠다.

나는 받아쓴다. 키냐르가 부르는 대로.

제5장 노르트스란트

아르노와 니콜은 아르덴 지방에 숨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의 땅 속에서 눈에 띄지 ㅇ낳고 앞으로 나가려 애쓰는 두 마리 두더지라고 말했다.

볼테르의 말에 따르면 자유롭게 글을 쓰는 기쁨이 아르노에게는 모든 것을 대신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포르루아얄 수도원은 미국의 한 섬을 사들여, 박해받은 청교도들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곳에 정착할 계획을 구상했다.

그들은 홀수타인 해의 섬 노르트스트란트에 눈독을 들였다.

나는 지도에서 노스트르트란트라는 이름을 찾는다. 홀수타인 해안을 찾는다. 그런 바다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잃어버린 것은 어디 있는가? 잃어버린 것이 사라진 곳, 바로 거기에 마지막 왕국이 있다. 나는 루아르 강의 출렁이는 파도에서 그 그림자의 일부를 찾았다. 그런 ㄷ음 머릿속으로 그림자를 상상했다. 그러자 그림자가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2020.07.25.

남강에서 잠자리 사진을 찍었다.

2020.07.26. 일요일

126쪽

이미지는 그 무엇의 재현이 아니다. 언어 없이 이미지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우리가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면에서 보는 장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지들이 문자에 앞서 전달했던 혹은 압축했던 신화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 의를 알지못할 것이다.

이미지는 인가보다 먼저이다.

그것은 인간의 입에서 자연 언어가 발화되기 이전부터 있었다.

나는 다음 견해를 주장한다. “몇몇 동물들의 경우 꿈이 지어낸 것은 어떤 방향의 상류에서든 매혹적이다.”

쓸모없어진 문자, 기의 없는 기표인 화폐는 회귀하는 욕망의 제삼자이다.

*

조르주 바타유의 『저주의 몫』은 어둠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책들 중의 하나이다.

126 그는 자신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있다.

131 길 잃은 자들. 산성액이 의례적인 사회 생활에 뚫어놓은 구멍 같은 존재들이다.

158 언어에서 메뤼진의 금기는 가장 아름다운 테마이다.

보는 이를 돌로 변하게 하는 메두사의 아름다움은 유일한 아름다움이다. 인간의 세상을 능가하는 아름다움이다. 갑자기 몸이 마비된 짐승들이 알아보는 매혹적인 아름다움이다.

우울증 환자, 실어증 환자, 무언증 환자, 신생아, 어린애, 동상가, 진정한 음악가, 에로티시즘 애호가, 환상가, 사랑에 빠진 사람, 죽어가는 사람, 그들에게 그것은 유일한 아름다움이다.

말로 표현되려고 애쓰는 무엇을 생각하면서 알기도 전에 느끼는 것, 그것은 틀림없이 글을 쓰는 움직임이다. 한편으론 언제까지나 혀끝에서 맴도는 말로, 다른 한편으론 손끝에서 달아나는 언어의 집합으로 글을 쓴다. 발견의 시초에 소위 알아맞힌다고 부르는 것이다. 알겠다! 뭔지알겠어! 이어지는 것에도 초발심의 강도로 다시 불붙이기

159쪽

이전의 어둠에서 모든 것을 ㄹㄹ끄집어내기, 사라진 것에 끝없이 줄을붙이기, 바로 그것이 엄밀히 말해 독서이다. 소멸하는 모든 것에 늦게나마 제 색깔을 찾아주기.

사방에서, 도처에서, 어디서나 새벽을 되찾기, 그것은 삶의 한 방식이다.

완연한 가을에 출생을 재현하기, 되찾을 수 없지만 사라진 여인을 소리쳐 부르기, 다른 기회란 없으므로 처음으로 불쑥 출현한 때 이 부단하고 예측할 수 없는 다른 존재를 다시 떠오르게 하기.

태어나기.

여전히 침묵과 관련된 언어는 둥지이다. 어둠과 관련된 가시 세계가 꿈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노래와 그 노래 뒤편으로 사라진 고대의 청각을 침묵으로 알려주는 문자, 그것이 문학이다.

그리고 마치 아직도 꿈속에 있듯 무의식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 혹은 천상의 이미지들을 재현해 놓은 동굴, 그것이 회화이다.

책들은 비밀의 사무국이다.

수도자에게서 수도자에게로

하나 사람에게서 한 사람에게로


2020.07.27. 월요일

166쪽 글을 쓰는 자의 고독과 읽는 자의 고독 사이에는 확고부동한 유대가 있다.

서울에서 승훈이 내외가 다녀갔다.

170쪽호메로스의 말이다.“비정치적인 한 개인은 내란이다.”

성경의 말씀이다. “혼자인 사람은 붏행할 지어다! 외톨이는 죽은 사라마이다.”

하지만 틀린 말이다.

지구 상의 어느 곳의 신화도 이렇게말하고 있다. “행복한 사랑이라ᆞ간 없다. 부족간의 교환과 계보상의 결합을 보존할 목적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행복을 맛본 금지된 연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은둔자, 방랑자, 주변인, 샤먼, 분리주의자. 포르투알의 은자들처럼 그 누구보다 행복했던 혼자인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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