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by 강민규

엇갈린 신앙, 갈림길에 선 마음

김해 율하동 율곡마을 2주공 아파트에 살던 그때, 서른을 훌쩍 넘긴 나는 매일 엄마에게 혼이 났다. 이유는 늘 같았다. 성당과 교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의 신앙생활 때문이었다. 처음 좋아했던 아이가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시작된 나의 교회 방황은 짝사랑이 끝난 후에도 묘하게 이어졌다. 성당은 어릴 적부터 다녔던 곳이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냉담 상태였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볼 때마다 한숨을 쉬셨고, 그 한숨은 나의 귓가에 따끔한 질책으로 와 박혔다.

이상하게도 교회 예배 시간은 견딜 만했다. 아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도 있었다. 찬양팀의 열정적인 목소리와 설교자의 힘 있는 메시지는 때때로 나의 메마른 감성을 촉촉하게 적셔주었다. 낯선 곳이었지만 그곳의 활기찬 분위기는 나를 붙잡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성당 미사 시간은 달랐다. 차분하고 엄숙한 분위기, 익숙한 듯 낯선 라틴어 기도문, 그리고 신부님의 잔잔한 강론은 나에게는 그저 견디기 힘든 지루함으로 다가왔다. 몸은 성당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밖을 향해 달아나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럴까?'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었지만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분위기의 차이였을까. 교회는 좀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느낌이었다. 새신자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말을 건네고, 함께 식사를 하고, 삶을 나누는 분위기였다. 반면 성당은 좀 더 정형화된 틀과 전통을 중시하는 듯했다. 미사 전후로 잠깐 마주치는 신자들 외에는 깊은 교류가 없었고, 나의 냉담은 그 어떤 노력도 시도하지 못하게 만드는 두꺼운 벽처럼 느껴졌다. 풀고 싶어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아니 풀 의지가 정말 있는 건지도 모호했다.

나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익숙하지만 낯선 성당과, 낯설지만 묘하게 끌리는 교회. 엄마의 걱정 어린 잔소리는 나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어디에도 온전히 정착하지 못하는 나의 신앙은 마치 뿌리 뽑힌 나무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때의 나는 그저 방황하는 영혼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그 답을 찾기 위해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신장유센터, 그리고 나의 서른 초반

2019년, 나는 서른 초반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지금도 많이 부족하지만 그때는 정말이지, 갓 튀어 오른 팝콘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었다. 신장유센터 초창기 복지일자리에 뛰어들면서, 나는 나름대로 새로운 시작을 꿈꿨다. 환경정비 청소 일이라는 사실에 조금 시큰둥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돈을 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려 했다. 2019년부터 2020년까지 1년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나는 그곳 선생님들을 꽤나 애먹였다. 지금이야 "원래 저런 애였는데 많이 바뀌었네?"라고들 하시지만, 초창기에는 그분들이 나 때문에 적응하느라 고생 꽤나 하셨을 것이다.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지 않거나 사람들과 트러블이 생기면 곧바로 집에 와서 출근 안 한다는 식으로 버텼다. 이른바 '버티기' 작전이었다. 말없이 잠수를 타거나, 징징대며 투정을 부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철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때는 그게 나의 유일한 방어기제이자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이었다. 두 번의 복지일자리 환경정비 청소 일을 하면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조금만 힘들거나 기분이 상하면, 세상 모든 것이 불만스럽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

초창기에는 엄마 속도 꽤나 썩였다. "우리 엄마가 나쁜 사람이에요!"라고 떠들고 다녔으니 말이다. 내가 받은 월급도 안 주고, 용돈도 안 준다는 식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억울한 마음에 주변 사람들에게 하소연하고 다녔지만, 사실은 내 사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쏟아냈던 말들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는 내가 번 돈을 꼼꼼히 계산하고 계셨다. 보험료며 생활비며 필요한 것들을 다 제외하고 나면, 내 손에 쥐여지는 돈은 고작 2천 원 남짓이었다. 매일 허덕이는 내 처지를 알면서도,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나는 그저 세상 탓, 엄마 탓만 하고 있었다.

결국 초창기의 나는 미성숙한 덩어리 그 자체였다. 신장유센터 선생님들이나 엄마는 나의 그런 모습을 감당하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지금의 내가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 있었던 건, 그분들의 인내와 이해 덕분이라는 것을 이제야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때의 나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쳐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저 상처만 주는 존재였다. 돌이켜보면 부끄럽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흔, 뿌리를 내리다: 신장유센터에서의 두 번째 시작

시간은 참으로 신비롭다. 물리적인 속도는 변함없지만, 그 시간을 통과하며 깨달음을 얻는 나의 속도는 이제야 겨우 제자리를 찾은 듯하다. 2025년, 마흔을 갓 넘긴 나는 김해 신장유센터에서 착실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마친다. 지금의 이 평온한 일상은 불과 몇 년 전, 서른 초반의 내가 저질렀던 수많은 '트러블'과 '도피'의 그림자를 지우고 있다.

과거의 나는 폭발적이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거나 감정이 상하면, 그대로 도망치는 것이 내 방식이었다. 2019년, 신장유센터 초창기 시절, 나는 그곳 선생님들에게 숙제 같은 존재였다. 환경정비 청소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내 안의 불안과 미성숙함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늘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부딪히면 출근을 거부했고, 세상의 모든 불만이 나에게만 쏟아지는 듯 굴었다. 엄마의 속을 썩인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때의 나는 세상이 나에게 무언가를 빼앗아 간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이제 40대가 되니, 그 모든 격렬한 감정의 파도가 조금씩 잔잔해지는 것을 느낀다. 세월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일단 멈춤' 버튼이다. 혈기왕성했던 30대 초반과 달리, 이제는 화를 내기 전에, 도망치기 전에, 잠깐의 멈춤이 생긴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나는 깨닫는다. 도망친 자리에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신장유센터는 나에게 두 번째 기회의 땅이 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민규 씨가 많이 바뀌었다'는 칭찬을 듣는다. 이 칭찬은 나에게 큰 울림을 준다. 단순한 격려를 넘어, 과거의 나를 잊지 않고 지금의 변화를 인정해주는 따뜻한 연대의 표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서 좋은 동료들을 만났고, 그들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통해 비로소 '함께 일한다'는 것의 의미를 배웠다.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실수를 대하는 태도다. 여전히 실수는 한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허둥대기도 하고, 깜빡 잊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예전 같으면 당장 도망치거나, 혹은 남 탓을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저 웃어넘긴다. 그리고 주저 없이 말한다.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이 짧은 네 마디에는 나의 10년이 담겨 있다. 도피 대신 직면을 선택하는 용기, 변명 대신 책임을 지려는 의지,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성장하려는 겸손함. 선생님들이 웃어넘기며 괜찮다고 말해주실 때, 나는 비로소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안도감을 느낀다.

신장유센터는 나에게 단순히 일자리를 제공한 곳이 아니다. 방황하던 서른의 내가 뿌리를 내리고, 마흔의 내가 비로소 세상과 화해하는 법을 배우는 학교였다. 나는 이제 안다. 내가 번 2천 원이 소중했던 것처럼, 이곳에서 내가 지우는 먼지 한 톨, 정리하는 물건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는 깨끗한 환경과 편안한 하루를 선물한다는 것을. 늦었지만, 나는 지금, 어엿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나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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