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기억 (劍之記憶)

by 강민규

제2장. 벽산의 유산과 기인(奇人)의 등장


류원은 사막의 거친 바람 속을 꼬박 반나절을 걸었다. 그의 등 뒤로 주막에서 풍겼던 핏빛 잔향은 이미 모래바람에 흩어진 지 오래였다. 그가 도착한 곳은 산맥이 끝나는 지점에 병풍처럼 우뚝 솟은 봉우리, **벽산(碧山)**이었다.

10년 전, 벽산문이 있던 곳은 지금은 폐허 그 자체였다. 거대한 불길이 휩쓸고 간 흔적, 무너진 기와와 재만 남은 목재들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류원에게 이곳은 고향이자 모든 것을 잃은 비극의 현장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폐허 속을 걸어 문주의 처소였던 곳으로 향했다. 스승의 마지막 숨결이 닿았던 바로 그 밀실을 찾아야 했다.

류원은 잔해를 걷어내고, 돌무더기를 헤집었다. 그의 손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마침내, 불길에도 그을리지 않은 단단한 암반의 입구를 발견했다. 입구에는 벽산문의 문양 대신, 스승이 마지막으로 보여줬던 붉은색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칼의 기억'의 각인.

류원은 품에서 작은 옥패를 꺼내 문양의 특정 부위에 대었다. 옥패에서 나온 미약한 기운이 문양과 닿자,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암반이 옆으로 밀려나며 지하로 통하는 어두운 계단이 드러났다.

류원이 밀실로 들어섰을 때, 공기는 10년 전 그날의 것과 같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밀실은 놀랍도록 온전했다. 중앙에는 단단한 흑철로 만든 좌대가 있었고, 그 위에는 검이 아닌... **한 권의 낡은 비급(秘笈)**이 놓여 있었다.

류원은 떨리는 손으로 비급을 집어 들었다. 제목은 굵은 해서체로 **《심검록(心劍錄)》**이라 적혀 있었다.


“칼은 형체가 있으나, 검심(劍心)은 형체가 없다. 무형의 검, 무영의 경지. 칼의 기억은 형체가 아닌, 마음속에 새겨지는 것이다.”

첫 장을 읽자마자 류원의 머릿속으로 번개 같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스승이 말한 '칼의 기억'은 단순히 검의 행방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벽산문의 궁극적인 심법(心法)**이었던 것이다.

류원이 《심검록》에 몰두하여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쏴아아—!

갑자기 밀실 입구에서 강렬한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바람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벽산문의 폐허를 가로지르는 소리. 그리고 이어서, 맑고 은은한 금속성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류원은 즉시 비급을 품속에 감추고 허리춤의 검은 검을 잡았다. 그의 자세는 순식간에 공격 태세를 취했다.

밀실 입구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곧이어,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중년의 사내로 보였으나, 얼굴은 깨끗하고 눈빛은 천진난만했다. 낡은 도포를 입고 있었으며, 한 손에는 낚싯대처럼 보이는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무인(武人)이라기보다는 세상을 유람하는 **기인(奇人)**에 가까웠다.

"허허허, 재미있군! 폐허가 된 벽산문 아래에 이런 쥐구멍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사내는 류원을 보고도 전혀 경계하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당신은 누구시오?" 류원의 목소리는 낮고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내는 류원의 검을 한번 훑어보더니 빙긋 웃었다.

"이 몸은 **'천기자(天機子)'**라고 하오. 자네처럼 풋풋한 젊은이가 이런 험한 곳에서 뭘 숨기고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지."

"숨길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사사로운 장소이니 떠나주십시오."

"사사로운 장소라... 10년 전, 수백 명의 피가 엉겨 붙은 이곳이 사사롭다니. 자네, 벽산문의 후예인가?"

천기자의 말투는 가볍지만, 그의 눈빛은 류원의 내면 깊숙한 곳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류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벽산문의 후예임을 알리는 것은 곧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천기자는 류원의 검은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검... 녹이 슨 듯 보이지만, 그 안에 엄청난 기운을 숨기고 있군. 게다가 자네의 가슴에 새겨진 그 핏빛 각인... 놓칠 리가 없지. 그것이 자네를 이끌었군."

류원은 충격을 받았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스승의 각인을 알아본 이는 천기자가 처음이었다.

"어떻게 아셨소?"

"허허, 이 천기자의 눈은 하늘의 비밀까지 꿰뚫는다오. 그 각인은 자네 스승인 벽산문주가 마지막으로 남긴 **'무명검'의 검혼(劍魂)**을 담는 그릇이지."

천기자는 낚싯대 지팡이를 땅에 톡톡 두드렸다.

"자네가 지금 품에 안고 있는 비급, **《심검록》**이 그 검혼을 깨우는 열쇠일 터. 하지만 명심하게. 검혼을 깨우는 순간, 자네는 중원의 모든 칼이 노리는 표적이 될 걸세. 특히 **'무영'**의 그림자가 다시 자네를 덮칠 테니."

천기자의 말은 류원이 알고 싶었던 모든 비밀을 담고 있었다. 류원은 검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천기자님. 소생을 도와주십시오. 무영과 무명검에 대해 아시는 모든 것을 알려주십시오."

천기자는 류원의 요청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사실 자네를 만나러 왔지. 자네의 몸에 새겨진 '칼의 기억'이 마침내 깨어나는 때가 왔음을 알았으니. 하지만 조건이 있네."

류원은 천기자를 올려다보았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자네가 이 천기자의 길벗이 되는 것. 험난한 여정에 나 혼자 다니기에는 외롭거든."

류원은 천기자의 예상치 못한 제안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기인은 의문투성이지만,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를 따라야만 잃어버린 '무명검'을 찾고 복수를 이룰 수 있을 터였다.

류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류원, 천기자님의 길벗이 되겠습니다."

천기자는 활짝 웃으며 낚싯대 지팡이를 하늘로 휙 던졌다. 지팡이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더니, 뱀처럼 유려하게 휘감아져 내려왔다.

"가자, 류원. 무영의 검을 찾으려면, 중원에서 가장 음침한 곳으로 가야 하네. 그곳에 그 칼의 진정한 비밀이 잠들어 있지."

류원은 폐허의 밀실에서 벗어나 중원으로 향하는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는 모든 것을 아는 듯한 기인 천기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는 피로 새겨진 '칼의 기억'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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