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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안 Apr 19. 2023

한때 당신의 전부였던,
기숙학원 이야기 4

04. 새벽의 노크 소리 1 - 탄산 예찬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커피를 마시며 신성한 하루의 일을 준비하는 사람

둘째는 일을 마치고 술로 인생의 허전함을 달래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고된 일과를 마치고 샤워를 한 뒤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는 사람     


마지막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다.     


 태초에 신은 자기를 대신해 ‘일을 해줄’ 생명체를 창조했다고 한다. 노동의 신이 창조의 신에게 일이 힘들다고 투정을 부려 만든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처음 이러한 창조설화를 접했을 때, 나는 신에 대한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이 들었다. 만약 나의 아버지가 일할 사람이 필요해서 날 낳았다고 한다면, 나의 아버지는 최소한 아동 학대죄로 경찰에 붙잡혀갔을 것이다. 운 좋게 경찰의 수사망을 피한다 해도, 내가 집에서 쏜살같이 도망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 나에겐 그 무엇보다 사랑이 중요했다. 일을 시키더라도 사랑하니까 시켜야 인정이 됐다. 만일 노예 취급을 당한다면 누구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의 친척 아비집을 도망쳐 나올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좀 무뚝뚝하고, 이따금 알 수 없는 이유로 거대한 분노를 터뜨리는 분이셨다. 아버지의 분노 덕분에 집안엔 살림이 남아나질 않았다. 사업가는 그랬다. 지킬 것이 많아 강해 보여야 한다. 아버지 시대는 더욱 그랬다고 한다. 약육강식이 만연한 사회에서 아버지는 야수가 되어야 했다. 그런 사회적 가면이 가정에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다. 아버지는 무슨 던지기 선수마냥 손에 잡히는 것들을 집어 던졌지만, 적어도 나를 사랑으로 대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아버지가 나를 던진 적은 없으니까.     


 나는 아버지 덕분에 원하는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었고, 학업에 매진할 때는 금전적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다. 나라에 IMF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도 나는 나름 풍요롭게 지냈다. 가세가 기우는 줄도 모르고 정말 돈 걱정 없이 산 것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IMF시절 아버지는 새벽 시장에 나가 고추나 양파같은 식재료를 싼값에 사서 서울아파트 단지에 파셨다고 한다. 혹여나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그 먼 서울까지 올라가 장사를 하셨다고 한다. 당시 부부싸움이 잦았던 것도 아버지의 잠 부족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매번 아버지께 용돈 좀 많이 보내달라고 독촉 문자를 보내곤 했다.     


 당시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원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고 한다. 집에선 가족 모두가 무서워하는 아버지셨는데, 그 시절 아버지는 새마을 모자를 쓴 아파트 경비원을 제일 무서워했다. ‘경비원에게 내쫓기면 내 자식들이 굶는다.’ 그게 아버지가 느낀 두려움의 원천이었다. 아버지는 서울 곳곳을 누비며,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셨다. 그리고 거의 매일 허기진 배를 움켜잡았다. 다부진 키의 건장한 사내는 그 와중에도 자식들이 굶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어느새 아버지의 손은 철없이 못난 자식 때문에 고목 나무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손등은 가뭄 난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마른 가지처럼 보였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항상 마음이 아프다. 젊은 시절 아버지 사진을 보면 환하게 웃고 계신 모습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자식을 사랑으로 기른다는 건 자신의 웃음을 포기한다는 뜻인가보다. 무뚝뚝한 나의 아버지도 나 같이 철없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기쁨을 포기하셨다.     


 그런데 세상을 하루아침에 세우고 무너뜨릴 힘을 가진 전지전능한 창조자가 인간을 노예로 쓰기 위해 창조했다는 소릴 들으니 화가 났다. 인권이 보장된 나라의 신은 아마 지금쯤 감옥에 갔을지도 모른다. 죄명은 인간 학대죄.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신의 모습을 본 따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또 신의 사랑이 아주 미약하게나마 느껴지긴 했다. 신의 가장 오묘한 점은 신을 가장 싫어하게 될 대목에서 오히려 가장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신의 형상이라니 꽤 나쁘지 않은 대목이다. 우리 아버지도 신의 모습을 닮으신 거겠지. 아버지는 폭력성을 가진 따뜻한 상남자였다. 폭력성을 가진 따뜻한 인간이라니. 나만큼 우리 아버지도 참 아이러니한 분이다. 아버지는 술을 한잔도 드시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술 대신 탄산을 먼저 배우게 되었다.     


 신의 모습을 한 인간이 무언가를 창조해 낸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발효되는 맥주의 거품을 보고 ‘저 녀석 맛있을 수도?’라고 생각해서 음료에 이산화탄소 기포를 넣은 것이 바로 탄산음료의 시초다. 인간의 몸도 신비롭다. 폐로 들이키면 독이 되는 이산화탄소가 목으로 넘겨져 몸속에 흡수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흡수가 안 되면 트림으로 나오는 놀라운 모습도 보여준다. 참으로 신비롭지 않은가?

 노예로 창조된 인간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신은 인간에게 술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술로 새로운 위로의 매개체인 ‘위대한 탄산’을 만들어 냈다. 나 같은 술찌들에겐 탄산음료는 기적과 희망 그 자체이다. 탄산음료를 발명한 사람에겐 진짜 ‘노벨 위로 상’을 줘야 한다. ‘노벨 위로 상’이 없다면 항목을 만들어서라도 줘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주고 싶다.     


 기숙학원 야간 선생님의 근무는 밤 12시 반이 지나야 끝이 났다.


오늘도 고된 하루였다. 그나마 탄산 망상이 없었다면 더 고된 하루였을 것 같다.     


'탄산 만세’ 


 나는 숙소 1층 공용 냉장고 안에 <선생님 물품>이라고 적힌 박스에서 ‘위로의 심볼’을 꺼내 들었다.

몸에 전율이 흘렀다. 콜라 캔을 손에 쥔 것만으로도 차가운 위로가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내 피엔 탄산이 흐르나 보다. 마음이 차갑게 따뜻해진다. 나는 룰루랄라 엉덩이춤을 추었다. 



그리고 이때까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날 나의 하루는 끝이 아닌 시작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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