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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안 Apr 15. 2023

한때 당신의 전부였던,
기숙학원 이야기 3

03. 버려지는 아이들 2

정작 큰집에서는 꼬맹이 손자의 편식을 고치기 위해 

김치를 먹이지 않았다. 


 밥상에는 김치가 있었지만 억지로 먹으라고 권유하지 않았다. 김치를 먹지 않는다고 혼나지도 않았다. 할아버지는 갓을 쓰고 다니셨다. 흰색 한복에 도포까지 두르고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르셨다. 마당에 나와 턱수염을 양손으로 쓰다듬으시며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말 그대로 조선시대를 떠올리게 만드는 비주얼이었다. 할아버지는 손자 손녀들 앞에서 단 한 번도 웃지 않으셨다. 명절엔 남자들과 여자들이 따로 상을 차려서 먹을 정도로 유교 사상에 심취하신 분이셨다. 신년에 세배를 드리면 벽에 난 작은 창문 같은 창고의 문을 열어 손자들에게 과자를 던져주시곤 했다. 자신의 생일상 앞에서도 웃으시는 법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엄격함 때문에 내가 김치를 먹게 될 거라고 믿으셨다면 큰 오산이었다. 한 가지 아버지의 뜻대로 된 것이 있다면, 밥상에 야채와 채소만이 가득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어느 반찬도 손대지 않았다. 밥에 물을 말아 끼니를 때우는 날들이 계속됐다.     


 기숙학원에 들어오는 아이들의 대부분이 슬픔을 안고 입소하는 것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고3때 나태하고 게을렀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입소한다. 자신의 인생에 만회할 기회를 주기 위해 부모를 설득해 스스로 입소하는 경우도 다분하다. 개중에는 심각할 정도로 얼굴이 어두운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이 바로 버려지는 아이들이다.     


 수능을 망쳤어도 웃음으로 일관했던 아이들. 공부보단 노는 것이 좋았던 해맑은 아이들. 아이들은 수능이 끝나고 가족 여행을 계획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부모님과 오랜만에 떠나는 가족 여행이다. 그것도 일주일 동안의 꽤 긴 여행이다. 산과 바다, 강과 푸르른 들판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스키를 좋아하는 아이는 스키장에 가자는 부모님의 말에 신나게 캐리어를 싼다. 입고 싶었던 옷들도 잔뜩 산다. 설레는 마음에 인스타에 자랑이란 자랑은 다 해놓는다.      


#가족여행 #수능 그까이꺼 #우리집 클라쓰 #다녀와서 보자 #추억 쌓기     


 부푼 기대를 안고 아이들이 도착한 곳은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어느 선생이 서 있는 기숙학원 운동장이다. 그 선생이란 작자는 어울리지도 않게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래봤자 사교육에 월급을 받는 월급쟁이에 불과하다. 엄마 아빠 모두 의사인 어떤 집은 아이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수강료 10개월 치를 완납해 놓는다. 절망. 좌절. 분노. 그 어떤 단어도 성에 차지 않는다.     


 김치를 먹지 못한다고 큰집에 버려진 나는 결국 김치를 먹지 못했다. 이처럼 공부를 못한다고 기숙학원에 버려진 아이들은 바뀌지 않는다. 이렇게 버려진 아이들은 공부를 단 한자도 하지 않는다. 시간과 기억은 상대적이다. 버린 사람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 가지만 버림받은 자의 기억은 날이 갈수록 더욱 생생해지는 법이다. 내가 경험해 봐서 안다.     


 며칠째 물에 밥만 말아 먹으니 속이 쓰리다. 소화액이 물에 희석되니 제대로 소화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편식을 끝내고 골고루 먹어 살이 쪄야 할 손자가 점점 야위어 간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큰아버지와 큰 엄마의 시름이 깊어간다. 편식하는 손자 때문에 화가 날 법도 한데 할아버지께선 나에게 짜증 한번 내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무섭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엄격한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김치나 다른 채소를 먹어보려 했지만, 몸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토하고 토하다 선택한 것이 물에 밥을 말아 먹는 것이었다. 밥 먹는 시간마다 고통이었다. 그나마도 이젠 속이 쓰려 하지도 못할 처지였다. 며칠 후, 간장이 밥상에 올랐다. 큰집 식구들은 어린 손자를 위해 놋그릇 종지에 간장을 담아 밥상에 올려 주셨다. 아버지는 나를 속여 큰집에 머무르게 했지만, 큰집에서 나는 김치와 씨름하지 않아도 됐다. 종지에 담긴 간장을 보고 나는 울컥 눈물이 났다.     


 부모가 떠나고 남겨진 아이들은 날이 갈수록 학원의 규율을 어기며, 선생님들에게 반항 아닌 반항을 시작한다. 오전 수업에 왜 빠졌냐고 혼내는 선생님에게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소리를 지른다. 양호실에서 컵라면을 먹다가 걸리고, 화장실에서 휴지를 태우다가 반성문을 쓰기도 한다. 죄 없는 숙소 벽을 주먹으로 내리쳐 벽에 구멍을 내버린다. 뭐가 마음에 안 든 건지 변기를 부숴버리기까지 한다. 변기에 휴지를 왕창 풀어 넣어 막히게 만든다. 다시 사춘기가 왔나 보다. 미운 스무 살의 닫힌 성장판이 과거로 회귀한다. 그럴수록 선생님들의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 소위 문제아들. 학원은 찍힌 아이들의 리스트를 만든다. 강제퇴소를 시킬 목적으로 반성문을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때가 되면 부모들에게 아이들이 쓴 반성문을 경찰의 진술서처럼 내민다. 부모들은 얼굴을 붉힌 채 쥐도 새도 모르게 아이들 빼내 간다. 스키장인 줄 알고 차에서 내린 아이들에게 드디어 자유가 허락된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할아버지의 간장 종지를 떠올렸다.



스키장에 간다고 하고 여기에 왔을 땐, 진짜 죽고 싶었어요.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이없으면서도 슬펐다. 그리고 기가 차서 웃었다. 편식하는 아이들도 아닌데, 왜 그런 웃지도 못할 속임수를 써서 이곳에 보낸 걸까? 나는 나처럼 버려진 아이들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알았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부모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안다. 중요한 것은 진실 그대로를 아이들에게 말해 주어야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채소만 먹는 큰집에 보내진다고 편식이 나아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공부하는 환경에 놓인다고 공부를 잘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내 경험상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다. 아니, 모든 아이들이 그렇다.     


 하루는 밥상에 간장 종지와 고추장이 담긴 종지가 같이 올라왔다. 나는 간장을 선택했다. 그런데 탐스러운 붉은 빛의 고추장도 먹고 싶어졌다. 그날따라 고추장이 더 없이 빛나기도 했다. 아마도 큰 어머니께서 고추장 위에 참기름을 떨어뜨린 것 같았다. 어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간장과 고추장을 한 숟가락씩 퍼서 밥에 넣고 비볐다. 그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가 큰소리를 내며 웃으셨다. 어찌나 크게 웃으셨는지 큰 어머니께서 부엌에서 깜짝 놀라 달려왔을 정도였다. 할머니는 큭큭 거리는 할아버지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숟가락을 떨어뜨리셨다. 생전 그렇게 크게 웃으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본적이 없다. 무언가 뿌듯한 마음이 딱딱한 마음을 비집고 튀어 나왔다.     


 가족 여행을 간다고, 스키장에 간다고 버려졌던 아이들은 기숙학원이란 한정된 공간에서 저지를 수 있는 온갖 기행을 저지른다. 결국 열이면 열,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부모들은 군대에 보내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내 경험상 기숙학원이 군대 보다 100배는 더 힘든데 말이다. 협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기숙학원에서 변하지 않은 아이들이 군에 간다고 해서 바뀔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난 3사단 최전방 백골 부대를 만기 전역했다. 훈련 중 단 한 번도 낙오한 적 없었던 나는 백골 부대보다 기숙학원이 더 힘들었다.     

 퇴소가 결정 난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단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아이들이다. 웃는 아이들을 보면 괜히 미안해진다.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 다녔던 할아버지는 웃는 방법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문제 있는 아이들에게도 웃음이 있었다는 것에 괜시리 미안해진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아프지만 말라고 말해 준다. 그리고 건강 하라고 말해 준다. 웃을 줄 아는 인간은 눈물 흘릴 줄도 안다.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어요.”라는 말에 나는 더욱 미안해진다. 나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간장 종지 하나 주지 못했다.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이자 목표 중 하나는 라면을 맛있게 먹는 것이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김치를 곁들인 라면”을 맛있게 먹는 것이다. 어쩌면 평생 알지 못할 그 황홀한 맛을 음미해 보는 것이 나의 꿈이다. 김치만 있어도 밥 한 끼를 뚝딱 할 수 있다는 미스터리를 나의 미각으로 풀어낼 날도 언젠가는 오겠지.     

시간이 꽤 지났다.


 할아버지는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장수를 하셨고, 역시나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 두 분의 배려와 사랑이 아니었다면, 나는 내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김치찌개 맛을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이제 김치는 나에게 고통의 대상이 아니다. 나에게 김치는 찌개 요리의 재료가 될 뿐이다. 두 분이 내 인생에 남긴 소중한 유산이다. 공부 또한 고통의 이유가 되어선 안 된다. 공부는 행복을 만드는 많고 많은 재료 중 하나일 뿐이다.     

큰집에 버려졌다는 아픔을 이제는 글로 풀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또렷하기만 할 것 같았던 기억도 세월 앞에 무뎌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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