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3년 이후, 서양 세력은 일본에 줄기차게 왔고, 또 교역을 하고 싶어 했다. 왜 그랬을까? 뭔가 이상하지 않나?
예컨대 명나라라면 이해가 간다. 지대물박(地大物博)이라고 땅이 크고, 물산이 풍부하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별로 크지도 않고(오늘날의 오키나와와 홋카이도는 당시 일본이 아니었다.) 항해 거리도 가장 먼 축에 속한다. 6개월마다 계절풍도 바뀌기 때문에 당시 범선으론 한계가 많았다.
그런데도 포르투갈은 1639년 쫓겨날 때까지 매달렸고, 그 뒤를 이은 네덜란드는 어쨌든 1858년까지 나가사키의 데지마에 상관을 유지했다.
왜 그랬을까?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의 경우는 포교를 원했으니까? 그럼 뒤에 온 네덜란드는? 그들은 종교적 활동은 전혀 안했는데? 뭔가 다른 매력이 일본에 있으니 서양 세력이 왔지 않았겠는가!
그렇다.
당시 일본에는 세 가지 큰 매력이 있었다. 바로 노예, 인구, 은(銀).
먼저 노예에 대해 알아보자.
이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라 수많은 전쟁 포로와 난민을 양산하고 있었다. 이미 대서양과 인도양에서 노예무역을 하던 유럽 노예상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들에게 일본은 기회의 땅이었다. (물론 노예가 일본인만 있는 건 아니었다. 조선인과 한족들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한반도 및 명나라 연안에 왜구의 침략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만 하더라도 삼포왜란(1510), 사량진왜변(1544), 을묘왜변(1555) 등 무수히 시달렸고, 국가 재난급 피해를 입었다. 무엇보다 인력 손실이 컸는데 이때 많은 조선인들이 왜구에게 나포되어 노예로 팔려간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유럽에 최초의 동양인(일본인일 가능성이 높다)이 노예로 팔려간 게 1553년이다. 타네가시마에 조총을 전수한 지 불과 10년 만에 인도양과 대서양을 넘나드는 노예 무역망이 형성된 것이다!!
이때부터 거의 50여 년 간 일본은 많은 노예를 공급했다. 물론 도요토미 시대 이후 노예거래가 불법화되면서 일본인 노예무역은 격감했지만, 임진왜란 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오는 바람에 오히려 특수를 누렸다. 유럽 노예상들은 이들을 동남아나 향료제도, 마카오, 유럽 등으로 팔아넘겼다. 이때 유럽인들은 아직 조선에 대한 정보도 없었을 뿐더러(섬인지 반도인지도 모를 때였다), 이들에게 동아시아인은 그냥 인디언 아니면 시나인(차이니즈)이었다.(유럽인들에게 그냥 아시아는 동인도, 아메리카 대륙은 서인도였다. 그나마 시나인이라고 불러주는 유럽인은 이 지역 혹은 신대륙에 거주하거나 지리 지식이 많은 사람들뿐이었다.) 일본인의 경우 지리적으로 가까운 마카오나 필리핀 정도에서나 하폰(일본)이라는 국적 표기를 해줬다. 그런데 조선인들은 일본을 거쳐 왔기 때문에 대부분 하폰인으로 표기되어 팔렸다.
그 다음 인구에 대해 알아보자.
에도 막부 이후에 노예무역은 힘들게 됐지만, 여전히 명-일본-동남아를 잇는 중계무역은 짭짤했다. 네덜란드는 이것을 통해 동아시아 나라 중 일본에서 가장 큰 이윤을 남겼다. 이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인구 규모가 어느 정도 됐기 때문이다.
거기다 글 초반에 필자가 일본을 평가절하하기 위해 별로 안 큰 나라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 벼농사 지역인데다, 토질도 상당히 우수한 편이다. 그래서 이 시기 일본의 인구는 대략 1,200만 명 내외로 추정하는데, 이는 유럽 제국(諸國)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수다. 예컨대 대제국이라는 에스파냐도 본토의 경우 꼴랑 870만 명(식민지 제외),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겨우 150만 명, 스웨덴은 불과 13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즉, 인구로만 봤을 때 일본은 무시 못 할 규모인 것이다. (이 시기 일본은 면적상으론 세계 육지 면적의 0.19%에 불과하지만, 인구로 따지면 2.1%나 차지했다. 세계 순위로도 8위에 해당하는 인구 대국이었다.)
마지막으로 은(銀)에 대해 알아보자.
첨부하는 지도를 보면 필자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일본은 화산 열도로 무려 4개의 지각 표층(tectónic plàte)을 갖고 있다. 즉, 필리핀판, 유라시아판, 태평양판, 북아메리카판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런 자연환경 때문에 일본에선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 일본 지리 환경의 단점이다. 하지만 이건 동시에 장점도 제공한다. 4개의 판이 모이는 곳이라 지표면 아래로부터 광물 자원이 많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나라 자체가 크지 않아서 광물의 총량이 많진 않지만, 그 종류는 매우 다종다양한 편이다.
그리고 이 광물 중 일본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게 바로 은이었다. 학자마다 다르지만, 16세기 후반 전성기 때 세계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은 무역량이 30%에 이르렀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리 광물이 많아도 인간의 기술력이 없으면 소용없다. 16세기 일본이 대량의 은을 생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조선(명나라라는 주장도 있다)에서 연은분리법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이 방법을 최초로 알아낸 사람들은 평민인 김감불과 노비인 김검동이었는데,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기술이 잊혔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은 생산이 많아지면 명나라에 바칠 공물이 많아지기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도 불가피하게 억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일본의 경우, 섬나라라 명나라의 간섭을 걱정 안 해도 됐기 때문에 마음 놓고 생산할 수 있었다. 즉,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건 지리적 차이가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에도 막부 초반이 되면 광맥이 고갈되는 걸 걱정해 은 수출을 억제했지만, 이때는 또 다른 대안이 있었다. 바로 적동(赤銅, red copper). 일본산 적동은 유럽에서 고급으로 취급을 받아 수요가 꾸준했다. 이러한 양상은 18세기까지도 이어진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기를 쓰고 일본에 오려했고, 나중에는 네덜란드와 잉글랜드(1613년 히라도에 상관을 세웠다가 1623년 철수한다)까지 진출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쿠로시오 해류’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첨부한 지도를 보면 왜 일본으로 그 많은 서양 배들이 갔는지를 알 수 있다. 일본에 비해 조선의 경우 표착하거나 떠밀려오는 서양 선박의 수가 거의 없는 수준인데, 왜냐하면 대륙과 열도 사이에 끼인 반도라 해류가 훨씬 약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일본이 한반도로 향하는 대부분의 배들을 intercept(가로채다)했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조선보다 일본이 유럽 세력을 접할 기회가 더 많았고, 결과적으로 큰 역사적 차이를 만들어냈다.
예컨대, 일본은 이미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아 빵, 덴푸라, 카스테라(카스티야의 빵이란 뜻), 카보챠(단호박, 캄보디아산 작물을 포르투갈인이 전파), 타바코(담배) 등의 단어를 썼고, 또 일포사전까지 만들었다.
포르투갈이 쫓겨나고, 네덜란드가 그 자리를 대체한 이후에는 또 난학(蘭學)을 형성해 영향을 받았다. 유럽 의학을 집대성한 《타불라에 아나토미카에》(Tabulae Anatomicae)를 《해체신서》(解體新書)라는 번역서로 출간한 게 무려 1774년이다. 이때 번역에 참여한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가 와세이칸고(和製漢語, 일본식 한자어)를 개척한 인물이다.
겐파쿠 이후 많은 번역가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우다카와 요안(宇田川榕菴), 이치카와 세이류(市川清流), 니시 아마네(西周), 그리고 저 유명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까지…
politics를 政治(정치), economy를 經濟(경제), society를 社會(사회), culture를 文化(문화)라고 번역한 게 전부 근대 일본의 번역가들이다. 이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쓰이는 거의 대부분의 ‘근대 용어’는 일본인들이 번역했다고 보면 된다. 이 단어들을 정립하는 과정 또한 지난한 과정이라 무슨 단어가 단번에 결정된 것도 아니고, 오랜 논의와 토의 끝에 자리잡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서양의 개념을 번역하고자 하는 노력이 일본의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요인 중 하나다. 왜냐하면 한 단어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사회의 뿌리와 역사까지도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착각하는 게 일본의 근대화가 메이지 유신 때부터 시작됐다고 믿는 것이다. 아니다. 실제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고, 이미 에도 막부 때부터 그 토대가 차곡차곡 쌓인 것이다.
그리고 이건 조선인이 열등하거나, 일본인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그냥 한반도에 비해 일본 열도가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은 반도국가라 독자 연호를 쓸 수 없었다. 썼다간 대륙이 바로 침략해 올 거니까. 이게 결정적 한계였다. 그래서 명·청의 황제로부터 책봉의 표식으로 고명(告命, 인사 문서)과 면복(冕服, 면류관과 곤룡포)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리는 지정학적 위치값과 지리적 환경값을 가진다. 그런데 한반도는 이 두 가지 면에서 가히 최악이라 할 수 있다. 이점에 대해선 추후 논의하겠다.)
이에 반해 일본은 섬나라라 명·청의 영향을 안 받았기 때문에 독자 연호를 쓸 수 있었다. 전근대 시대, 동아시아에서 독자 연호를 쓰는 것과 안 쓰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그리고 이 차이가 20세기 초 일본을 지배국,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물론 섬나라라는 게 많은 경우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예컨대, 대륙으로 진출하기가 무진장 어렵다는 점, 고립되기 쉽다는 점, 고급 문명을 늦게 받아들인다는 점 등이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상황이 바뀐다는 점이다. 이는 역사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 즉 시간, 공간, 인간이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걸 설명하려면 또 다른 책을 따로 써야할 정도로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이는 차근차근 설명해 나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