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은 내 운명
시골 소재 전원 주택은 일단 값이 오르지 않는다.
원화 가치가 나날이 폭락하는 요즘, 인플레 방어가 전혀 안 된다.
결국 앉아서 재산상 손실을 보는 구조다.
더 치명적인 게 있다.
유사시 언제든 팔아서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대도시 아파트와 달리 환금성이 떨어진다.아무리 탈출하고 싶어도 귀인이 나타나기 전에는 탈출 불가다.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귀촌을 저질렀다.
귀촌을 준비할 당시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순간적으로 울뻔했다.그간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온 나라에 부동산 광풍이 몇 번이나 몰아쳤던 시절, 32년 동안 서울과 경기도를 오가며 직장 생활을 하고도 서울 중급지에 아파트 한 채 살 재산도 모으지 못한 여자가 나다.
그 주제에 달랑 매달 내 앞으로 나오는 연금 하나만 믿고, 용감하게 피같이 소중한 노후 보장용 재산을 싹둑 잘라 용감하게 전원주택을 지었다.
인정한다.
요즘처럼 서울 집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아다니는 시국에, 이 시골에 돈을 밀어 넣은건 재테크 측면에서 실수다.
다산 정약용같은 대학자도 아들에게 사대문 밖을 벗어나 집을 사면 안된다고 편지로 당부했다는데, 감히 내가 이 시골 땅에 돈을 묻었다.
아. 몰라!
쓰고 죽으면 재산
못 쓰고 죽으면 유산이라잖아.
난 쓰고 죽은 사람이다.
다행히 치명적인 액수를 밀어 넣은 건 아니잖아?
죽고 나면 애들이 별장으로 쓰든가 말든가...
참 이상도 하지.
정신 승리를 마무리하고 나면, 결코 부자가 아닌데 마치 큰 부자가 된듯한 이 기분은 뭘까?
은퇴 후 월급과 달달한 보너스가 통장에 찍히지 않는 고통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허리띠를 꽉 졸라매는 조치에 들어갔다.
한 달치 총지출 금액을 30일로 나눈 후, 하루에 허락되는 지출액을 산정했다.
이런 건 아날로그식으로 오가며 계속 보면서 뇌에 새겨야 습관이 된다.
작은 칠판에 그날의 총 지출액과 누계를 적어가면서 예산안의 범위에서 살림하는지 스스로를 감시했다.
'수입보다 지출은 적게'라는 원칙을 고수하며 평생을 살아온 나는 몇 달 후 곧 이 생활에 적응했다.
그럼 뭐하나?
그렇게 아낀 생활비를 한방에 털어가는 원흉이 바로 내 옆에 있는데.
소원하던 정원이 생기자 나는 한풀이하듯 이성을 상실하고 꽃과 나무와 구근을 사들여 땅에 묻고 또 묻었다.
급기야 마지막에는 장미에 빠져 백여주의 장미를 사들이고, 장미를 올릴 아치와 오벨리스크를 세우고 또 세우기에 이른다.
시골에서 소박하게 정원을 가꾸며 살겠다고 귀촌?
알고 보니 내 정원은 사치재였다.
이상도 하지.
통장은 텅 비어서 텅장이 되는데 불안하기는커녕 정원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기쁨과 기대, 설렘으로 뛰었다.
지난 5년은 생활비를 아낀 돈, 예상치 못한 수입이 생길 때마다 온갖 핑계를 대며 식물들을 사서 땅에 묻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내가 가지 말아야 할 금기의 장소는 나무와 꽃모종 따위를 파는 농원이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약 먹은 사람처럼 눈이 확 뒤집힌다나 뭐라나.
인정한다.
나는 식물 중독자다.
위험한 건 그뿐이 아니다.
SNS는 '네가 기다렸던 그 녀석이 드디어 왔다'며 나를 충동질 한다.
매번 '고민은 배송만 늦출 뿐'이라고 자위하면서 눈에 한번 꽂힌 건 결국 사들이고 만다.
심지어 이렇게 어차피 살걸, 더 빨리 사서 저 예쁜 걸 빨리 만났어야 했어라는 후회까지 한다.
얼마 전에도 '구군 대방출'이라며 단골 농원에서 날아온 문자를 본 순간 눈이 뒤집혔다. 내 딴엔 남편 눈치를 살피면서 참고 자제해서 겨우 16만 원어치만 샀다.
현관에서 땅에 묻어주기를 기다리는. 알토란처럼 토실토실한 구근을 볼때마다 이미 머릿 속에는 노랗고 하얀 수선화, 갖가지 색깔의 히야신스와 튤립, 페스츄리처럼 꼬불꼬불한 꽃잎이 겹겹이 쌓인 작약이 가득 피었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정원이 생기고, 남편은 결혼 후 처음 보는 아내의 과소비에 놀라 자빠졌다.
그때마다 나는 남편에게 되려 큰소리쳤다.
자기야!
나 평생 명품 백 하나 안 사본 여자야.
이래봤자 이거 백 하나 값도 안 돼.
(당신은 몇천짜리 자동차를 벌써 몇 번이나 바꿨잖아! 속으로 이런 말도 한다.)
반박 불가.
불안해하던 남편 표정이 진정제를 투여받은 듯 편안해진다.
하하하.
다행이다.
명품백을 하나도 안산 여자라서.
명품 백 팔이는 내 필살기다.
고백한다.
분명 처음에는 명품 백 발꿈치도 못 미치는 돈을 정원에 묻었다.
하지만 이미 명품 백 가격을 넘어선지 오래다.
마침내 집 지은지 만 5년.
정원을 바라보며 가끔 저곳에 몇 개의 명품 백을 묻었을까 상상며 혼자 웃음을 짓는다.
그렇다.
알고 보니 나는 대책 없이 위험하고 사치스러운 여자였던 거다.
나는 전원주택을 짓느라 명품 백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큰 재산을 탕진했다.
그것도 모자라 해마다 정원에 돈을 묻는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집도 없이 가난했던 젊은 시절부터 호시탐탐 정원을 꿈궜다.
아마 다시 돌아가도 작고 소중한 내 노후 재산을 싹둑 잘라 결국 귀촌을 저지르고 말았을 거다.
귀촌은 내 운명이다.
'아무리 애써 재산을 긁어 모아도 죽을때 다 두고 가야 한다.'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이 공평하고도 쌀쌀맞은 불변의 진리를 자주 떠올리면 사는게 조금 덜 불안하다.
내 재산은 조물주가 잠시 빌려 쓰고 가라고 허락해준 한시 자유 이용권임을 잊지 않으면, 감사한 마음으로 남은 시간을 현재를 누리는데 쓸 수 있다.
나는 요즘 한방에 명품 백을 지르는 대신, 소심하게 야금야금 재산을 탕진하는 수법으로 즐거움을 누리며 산다. 내게 정원 가꾸기는 작은 기쁨들을 더 오래, 아주 자주 선물해주는 가성비 최고의 소비다.
아!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