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은 내 운명
2차 항암을 마치고 가평 휴양림을 다녀온 후 우리 부부는 새로운 의식을 만들었다.
항암을 위해 입원을 앞둘 때마다, 퇴원 후 찾아갈 숲 속에 자리한 숙소 예약하기.
나는 20일 넘게 남편의 병실에서 쪽잠을 자면서 곧 숲에게 받을 위로를 미리 선지급해서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그리운 연인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듯 숲에 안길 날을 기다리는 힘으로 괴로운 시간을 견뎠다.
괴로움 뒤에 올 즐거움에 대한 약속!
그 의식을 만든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암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도 그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또 그 덕분에 지금의 귀촌지를 만날 수 있었다.
마침내 항암이 끝났다.
신장, 폐, 간, 백혈구, 혈소판 수치...
어느 하나 멀쩡한 것이 없었지만 남편은 그 지독한 항암을 이겨냈다.
큰딸에 이어 우리 집에는 '살아있는 것만으로 장하다'라는 칭찬을 듣는 인간 2호가 탄생했다.
마지막으로 암 수술만 하면 이제 드디어 끝이다.
기쁨에 설레며 남편이 휴양할 곳을 찾았다.
원적외선이 방출되어 암 환자에게 좋다는 황토구들방 숙소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찾은 마을이 지금의 귀촌지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산골 마을을 구슬처럼 맑은 시내가 감싸고 흐른다.
산속이라 한 박자 더디게 느릿느릿 동이 트고 일찍 해가 기울지만, 햇살이 눈 부신 마을이다.
게다가 시냇물을 낀 완만한 구릉의 숲 속 산책로까지 있다.
딱 내가 꿈꾸던 귀촌지였다.
마을은 수려한 경치 덕분에 외지인들이 하나둘 펜션을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펜션이 자리 잡은 마을들은 한결같이 자연경관이 빼어나다.
그러니 내가 홀딱 반할 수밖에.
나는 운 좋게 이곳에 전세를 얻어 집 지을 때까지 2년간 도시를 오가며 살다가 귀촌했다.
이상했다.
그간 귀촌을 염두에 두고 여러 곳을 여행했지만,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매번 차가 양양 요금소를 넘는 순간, 마음이 편안하고 따뜻해졌다.
대뇌에 이어서 이제는 심장까지 귀촌에 가담한 거다.나는 할 수 없이 기쁨에 겨워 날뛰는 심장이 이끄는 대로 양양에 귀촌하고 말았다.
금요일, 퇴근하면 서둘러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한 후 잠자리에 돌입할 수 있는 차림으로 차에 올랐다.
늦은 밤, 집에서 출발하면 딱 1시간 50분.
차 문을 열고 전셋집 마당에 발을 디디면, 검은 하늘에 교과서로 보았던 총총한 별자리들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둠에 몸을 숨긴 식물들이 '나 여기 있어'라며 진한 풀 내음으로 나를 반겼다.사방에서 뿜는 그 풋풋한 향기가 나를 덮치면 내 몸은 기쁨으로 요동쳤다.
치울 것 말 것도 없는 소박하고 정겨운 방 한 칸짜리 황토방 원룸이었다.
늘 3구 레인지를 켜고 소란스럽게 요리해서 상을 차리고, 남은 음식에 처치 곤란하던 습관을 지닌 내게 딱 한 구짜리 인덕션만 있는, 돌아서기조차 좁은 부엌은 아주 불편했다.그러나 곧 딱 한 가지 맛있는 요리만 해서 남김없이 먹고 치우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따끈따끈한 구들방에 깔린 이불을 살며시 들추고 몸을 밀어 넣으면 아이스크림 녹듯 스르르 밀려오는 기분 좋은 노곤함, 내 뼈 마디마디들은 온통 시원하다며 함성을 질렀다.
누워서 노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먼지 낀 알전구가 매달린 투박하고 튼튼한 대들보를 바라보노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구들방에 반해서 집을 지을 때 안방에 구들을 놓았다).
작은 밥상을 펴고 둘이 마주 앉으면 방안이 가득 차는 그 흙집은 위로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아파트의 널찍한 거실과 큰 방에 익숙했던 나는, 곧 작은 집이 주는 아늑함과 소박함에 반했다.
작은 것이 주는 사랑스러운 아름다움이었다.
숙소 문만 열면 폭신하고 찰진 땅이 환영하듯 발바닥에 달라붙는 기분 좋은 느낌.넓은 창이 주변의 경치를 방 안으로 끌어들여, 신기하게도 작지만 갑갑함이 없는 이 작은 집의 매력에 푹 빠진 나는 내 집도 이리 작고 아담하게 짓겠다고 마음먹었다.
혹시 염두에 둔 귀촌지가 있다면 꼭 그곳에서 최소한 4계절을 살아 보시길 권한다.
앞으로 오랜 세월 이웃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 대해 알고, 이들과 어울려 살 수 있을지 가늠해 보는 것은 땅 사고 집 짓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사실 외지인과 원주민의 갈등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조율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누가 맞고 누가 틀린 건 아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낯가림이 심한 나는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도시인들이 모여 생긴 이 마을이 참 좋았다.
혹시 모를 텃세를 걱정하는 데 힘을 소진하지 않고 내 살던 방식대로 살 수 있다는 건 큰 매력이었다.
게다가 살아 보니 서서히 시골 땅값의 진실이 드러나며, 생각지 않게 좋은 땅에 대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집터는 1년 넘게 아침. 저녁으로 전셋집 창밖으로 내다보며 탐을 냈지만 오천 평이 넘는 큰 밭이라 감히 꿈꿀 수 없던 큰 밭이었다. 우연히 그 땅을 분할 매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바로 달려가 원하는 위치의 땅을 샀다.
(물론 예산 초과 ^^)
무엇보다 시골은 온갖 벌레와 뱀을 비롯해 날것의 자연이 숨 쉰다.
자칫하면 애써 집을 짓고 뱀에 기겁해서 다 팽개치고 도시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초록이 사라진 겨울 풍경은 상상했던 것보다 삭막할 수 있다.과연 나는 날것의 이 모습들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지 겪어보자.
며칠 전 50년 후 서울 인구가 지금의 절반이 될 거라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서울이 이럴진대 양양이야 말해 무엇하리.
대학 시절 내가 찾았던 강원도는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자연이 한없이 아름다웠지만, 인구가 팽창하면서 강원도 곳곳도 거대한 도시로 발전했다.
한때는 베이비붐 세대들의 귀촌 바람이 불며 큰 땅을 사서 크고 아름다운 집 짓기가 유행했었다.
도시인들은 이제 더 이상 큰 땅과 큰집을 찾지 않는다.펜션을 운영하던 분들도 늙고 쇠약해져서 정말 아름답게 가꾼 펜션들이 착한 가격에 매물로 나온다.
부디 인간이 줄어든 틈을 타서, 무서운 복원력을 발휘해 고즈넉하고 깨끗한 예전 모습을 회복했으면 좋겠다.
삼십여 년 전 자연에 반해 길조차 없던 이 마을에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귀촌했다던 마을 분은 그 시절 사람 손이 타지 않은 이 계곡이 지금보다 얼마나 더 아름다웠는지, 지천으로 널린 산 더덕을 물리도록 매일 캐서 먹었는지 전설처럼 말씀하며 옛 모습을 그리워하곤 하셨다.
하긴 이 마을에 산 지 7년밖에 안 된 내 눈에도, 새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이전보다 더 훼손돼 가는 마을의 자연이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물론 나도 거기에 일조했다.
요즘 우리 마을도 귀촌 후 오랜 세월 사시다가 하늘로 돌아가시거나, 이동조차 어려워져서 도시의 자식 곁으로 떠난 분들이 계신다.
그런데 신기하게 마을 인구는 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좀 더 늘었다.
떠난 사람 자리에 어김없이 새 이웃들이 깃든다.
나처럼 자연에 반한 사람들이 우연히 마을을 찾았다가 그대로 주저앉은 까닭이다.
인구 소멸로 불편해질 미래를 걱정하느라 자연을 누리는 현재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