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봄? 봄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났다.

자연에서 배우다

by 즐거운가

봄이 이렇게 길 수 있?

귀촌 첫해

제일 먼저 나를 감동게 한 건, 지사방 넘쳐흘러 내리는 찬란한 봄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시작부터 끝지 지켜니, 봄은 지금까지 내가 알았던 것보다 훨씬 더 길고 깊었다.


그랬다.

나는 이 나이 먹도록 봄을 부만 스치듯 보고 느끼며 살아왔던 거였다.




아쉬웠던 봄

도시에서 직장을 다닐 때는 일에 쫓기느라 계절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날 발하듯 터지는 벚꽃 망울을 보고서야 봄이구나 싶어 마음이 설레었다. 꿈결처럼 보드레한 분홍빛에 취한 것도 잠시, 야속하게 그즈음이면 늘 비가 내렸고, 거짓말처럼 벚꽃 잎이 스러졌다.


고운 연둣빛 나뭇잎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가 싶었지만, 순식간에 검 초록이 되, 길고 지루한 더위와 장마가 몰려왔다.


그때마다 실컷 누리지 못하고 떠나보낸 짧은 봄날 그립고 아쉬웠다.




자연이 보여주는 모든 계절이 아름답지만 봄처럼 가슴 설레게 하는 계절이 또 있을까?

나는 그 설렘이 좋아서 봄을 사랑한다.


마법처럼 칙칙했던 회색빛 세상이 연두색으로 돌변하서, 여기저기 천국인 양 피어나는 매화, 진달래, 생강나무꽃, 복숭아꽃, 살구꽃, 벚꽃.... 그리고 결코 꽃의 아름다움에 뒤지 않는 피어난 싱그러운 나뭇잎들.


아아...

봄은 사랑이다.




모든 것이 잠든 듯한 지루한 겨울

초록이 그리울 때면 정원 나가 블루베리 나뭇가지를 만히 만져 보곤 했다.


안쓰러운 바새의 언 발가락 떠오르는, 다랗고 발그레한 나뭇가지.

하지만 손끝로 튕겨보면 물을 잔뜩 머금 탄력 넘친다. 싱싱한 생명력이.


조금만 더 견뎌봐.

기어이 봄 오고 말 테니.


하의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의 약속을 기억하며, 새로 올린 눈을 겨우내 물고 있는 강인한 나뭇가지를 볼 때마다 마움에 가슴이 다.





시골의 봄은 입춘과 함께 시작된다.

신기했다. 어김없이 입춘이면 거짓말처럼 공기와 바람, 햇살이 보내는 미묘한 작은 변화 눈과 피부와 숨결 느껴지는 것이.


귀촌 후 감탄한다.계절의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1년을 십사절기간을 음미하며 살아간 옛사람들의 지혜를.


입춘 걷는 남대천 산책길 햇살은 언제나 그 전날과 달랐다. 여전히 대천 물은 얼음장을 껴안고 있었지만, 이미 물가의 잿빛 버드나무 가지 오동통 수상해 보였다.


머지않아 온 세상아른아른 간질, 반란이 일어리라는 징조였다.


양지른 정원 한쪽에 두툼한 낙엽을 살며시 헤치면, 햇살을 받는 순간 초록으로 돌변할 노란 수선화 이파리가 이미 뾰족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미 봄이 시작됐다는 신호다.




경칩이 되면 더 이상 참지 못한 봄기운이 구석구석 핏줄처럼 나뭇가지를 내달린다.

순식간에 가지마다 감도는 아스라한 연둣빛.

천지 사방에 앞다투어 내미는 새싹.

성급한 바이올렛은 이미 양지쪽에서 앙증맞게 꽃을 피우고, 여기저기 손톱만큼 작은 쑥이 보인다.




쏟아지는 봄 햇살은 묘하게 사람을 흥분시킨다.

결국 참지 못하고 호미를 는다. 막 싹을 올린 구근을 들쑤시고, 미를 파서 옮기게 만든 건 내 변덕이 아니. 순전히 봄 햇살 탓이다.


포슬포슬하고 부드러운 향긋한 흙냄새. 금세 손톱 밑이 까매지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분 좋은 흙 놀이 빠진다. "내 마음속은 더 따뜻할 때까지 참아"라고 말하는데, 내 손목은 이미 싹둑싹둑 가위춤을 추며 새파랗게 물오른 장미 줄기를 자르고 있다.


찬찬하지 못해서, 성인 ADHD라며 딸에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늘 장갑을 안 끼고 장미 줄기를 눕혀서 묶다가 가시에 긁히고 찔려 기어이 피를 보고야 만다.


지?

아프고 따운데 즐겁니....




이제 내게 봄은 입춘부터 6월 말까지다.

무더위가 시작되는 6월을 내 마음대로 봄으로 편입시킨 까닭은 딱 하나.


미 때문이다.


정원을 가꾸면서 서서히 장미의 매력에 중독됐다. 귀촌 6년 차에 들어선 지금, 사부작사부작 심다 보니 급기야 100 여 주 가까이에 이르고 말았다.


그 장미가 뜻하지 않게, 게 길고 긴 봄 날을 선물한 1등 공신이 될 줄이야.




딩동!

올해도 숨 막히게 아름다울 봄날이 예약되었습니다.

얼마 전 정원이 내 가슴속로 문자를 보냈다.

올해도 내 정원에 길고 긴 황홀한 봄날이 닥칠 거란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문자가 도착함과 동시에 정원 하루가 다르게 일을 저지르고 있다.


봄을 알리는 입춘을 시작으로 겨울 끝자락을 밀어내고, 정원의 온갖 구근들이 눈과 서리 아랑곳하지 않고 앞다투어 초록 잎을 올며 생존 신고를 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이지만, 크로커스 시작으로 히아신스. 수선화. 튤립. 무스카리. 알리움이 형형색색 꽃을 피워대겠지....


한겨울 얼고 녹기를 반복하는 흙을 견디며 월동한 이 아이들은 놀랍도록 빳빳하고 탄력 넘치는 꽃대를 올린다. 그리고 상했던 것보다 아주 오랜 기간 꽃을 보여준다.


아파트 베란다 화분에서는 단 며칠 만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던 꽃들이다.


자신의 힘으로 월동하고 꽃 피울 때 개화 시기도 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나는, 이 가성비 넘치는 보물들을 발견한 것이 너무 기뻐서 뒤로 자빠질 뻔했다.



장미의 계절 5월은

4월부터 미친 듯 잎을 내며 헤아릴 수 없이 수은 꽃봉오리를 달, 내 심장을 저격한 장미들이 본격적으로 피어날 시기다.


장미들은 개화 시기가 조금씩 라서, 저마다 자신만의 시계로 돌림 노래를 부다.


아치마다 뒤덮은 숨 막히는 장미들.

모습을 보고 싶어서 1년 내내 시에 긁히고 찔려가면서도 까칠한 성격의 이 녀석들의 온갖 수발을 든다.


정원 생활자인 나는 이 봄을 보려고 1년을 살아간다.


장미가 피는 동안은 어느 하루도 기쁘지 않은 날이 없다. 장미가 벌이는 축제를 지켜보기 위해 나는 어떤 곳으로도 떠나지 못한다. 철저하게 집순이가 되어 신을 즐겁게 정원에 유폐시킨다.


거실에서 온종일 쏟아질 듯 흘러내리는 장미를 보며 '행복해'를 연발하노라면 어둠이 내리는 밤이 오는 것마저 아쉽다. 장미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어린아이처럼 내일의 해가 리 뜨기를 기다리면서 억지로 잠을 청한다.


개화 시기가 가장 느린 장미가 마지막 꽃을 피우고 시들어가는 시기가 딱 6월 말이다. 제도 끝난다.

불타는 여름이 오겠지만, 괜찮다.


나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길고 긴 봄을 충분하게 린 거니까....




귀촌 후 느릿느릿 잘근잘근, 계절을 씹고, 맛보고, 냄새 맡는다.

가장 행복한 건 그동안 짧서 아쉬던 봄을, 나만의 방식으로 길고 길게 엿가락처럼 늘며 즐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몇 달 동안 봄 즐기고 나면 김장배추처럼 행복 호르몬에 푹 절진 기분이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대체 뭐가 행복이지?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