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록
시금치, 달걀, 두부, 우엉, 배춧속, 시래기.
우리 집과 웃집은 큰길에서 외길로 제법 언덕을 오른 곳에 위치한 마지막 두 집이다. 그 언덕에 앞뜰까지 하면 관리해야 하는 면적이 꽤 되는데, 얼마 전 눈이 많이 내린 날 전부를 혼자 쓸어야 할 일이 있었다.
마당과 골목을 치우는 걸 큰 행복이자 특권이라 생각하는 터라, 혼자 그 긴긴 언덕을 내키는 대로 느릿느릿 치우며 정말 행복했건만 정작 이웃집 입장에서는 그게 적잖게 미안했다 보다. 그날도, 그다음 날도 감사 인사를 하시더니만 급기야 며칠 전에는 한 상 차려주셨으니. 내 입장에서야 좋아하는 눈 치우기를 실컷 했을 뿐인데 세상 맛있는 음식을 정월 초하루부터 넙죽 받아먹게 된 셈이라 민망하고 또 감사하다.
공동주택에 살지는 않지만 멀찌감치라도 이웃이 있어 든든할 적이 참 많다. 달이 얇은 밤에도 약속처럼 빛나는 창이라던가, 때때로 든든하게 울려 퍼지는 웃집 개 깜돌이의 목소리라던가, 그리고 가끔씩 이렇게 서로 주고받는 작은 마음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