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하당 Feb 25. 2022

피터 제르킨이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

무서록

가장 와일드한 ‘아드벡’은 무척 개성이 강하고 매력적이지만, 날마다 이것만 마시다 보면 조금쯤 지칠지도 모른다. 비유를 하자면, 영혼의 한 가닥 한 가닥까지 모조리 선연하고 극명하게 부각시키는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이 아니라, 어스름 속으로 새어 든 빛줄기를 가늘고 섬세한 손끝으로 더듬는 듯한 피터 제르킨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고 싶어지는 그런 평온한 저녁 무렵에는, 아련한 부케 향이 감도는 부나하벤 같은 걸 혼자 조용히 마시고 싶어질 것이다.
-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中, 무라카미 하루키

피터 제르킨(Peter Serkin, 1947-2020)


단독으로 내한한 적이 없어서인지,  비르투오소적인 면모가 부족하기 때문인지 한국에서는 유명세가 거의 없는 연주자다. 그 유명한 루돌프 제르킨의 아들로, 전통적인  레퍼토리에 집중했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바흐부터 메시앙(Messiaen)이나 다케미츠(Takemitsu), 너센(Knussen)에 이르기 까지 매우 넓은 시대의 음악을 다뤘다. 


모든 연주가 좋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레퍼토리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65년 첫 레코딩으로 이 곡을 선택한 것도 놀랍지만, 50년대 중반 독특한 해석을 앞세운 동곡 연주로 단숨에 거장의 반열에 오른 글렌 굴드의 해석으로부터 불과 10여년 만에 내놓은 완전히 자유로운 연주라는 것 역시 매우 놀랍다.


굴드가 강박적일 정도로 일정한 템포와 논 레가토 주법, 화성의 분해와 아티큘레이션으로 이  곡을 쌓아 올렸다면, 제르킨은 자연스러운 템포 위에 음색과 다이내믹의 변화, 그리고 유려한 프레이징을 바탕으로 하여 "음악"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차이는 두 연주자들의 젊은 시절 연주에서보다 만년의 연주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만년의 제르킨이  들려주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야말로 바흐의 건반 음악은 기계적이라는 일부의 잘못된 편견에 날리는 완벽한 카운터가 아닐까. 

1965(첫 솔로 스튜디오 녹음), 1982(프라이부르크 실황녹음, 한정 수량 LP발매)
1987(스튜디오 녹음, 음반사가 사라져 구하기 어렵다), 1996(스튜디오 녹음)
2017(리지우드 실황), 2018(뉴욕에서의 마지막 실황 음원)
2018(실황, 마지막으로 음반화 된 골드베르크 변주곡)

첫 솔로 녹음에 어렴풋이 녹아있는 아이디어가 차차 발전하며 나아가는 모습, 기교의 성숙과 쇠락에 따라 달라지는 해석의 차이, 삶의 끝에서 마주하는 아리아 다 카포(Aria Da Capo) 등 1965년부터 2018년까지 장장 50여 년간 이어진 제르킨의 여정을 함께 하다 보면 바흐가 남긴 이 걸작에 자연스레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된다. 


나무의 결을 따라 평생에 걸쳐 곱게 다듬어낸 소박한 조각품. 내면의 따스한 빛으로 담아낸 피터 제르킨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야말로 수많은 명연 중에서도 내가 망설임 없이 최고로 꼽을 수 있는 연주다. 


* 특히 2017년과 2018년(음반)의 연주를 추천한다.   

작가의 이전글 시금치, 달걀, 두부, 우엉, 배춧속, 시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