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록
제주의 집들은 남방형 가옥답게 대체로 일(一) 자형으로 지어져 있다. 구옥을 수선한 요즘 집의 경우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방이 놓이고, 예전 고방(광)이 있던 위치에는 부엌이나 화장실을 놓는데, 단출하지만 직관적이고 편리한 구조다. 그리고 아마 거센 바람 때문이겠지만, 기와를 올린 곳을 찾아보기는 어렵고, 예전의 제주식 초가지붕 대신 함석이나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다.
"함석", "슬레이트" 하면 서울 사람 입장에서는 산업화 시기에 우후죽순으로 지어지던 시멘트 상자 같은 집이 떠오르기 마련이라 이미지가 영 좋지 않은데, 제주는 경우에는 좀 다르다. 어디를 돌아보나 눈에 가득 차는 너른 하늘과 초록의 배경 위에 까만 현무암으로 둘레를 만들고, 흰색이나 미색으로 밝게 집을 짓는다. 그러고는 주황색, 피란색, 초록색, 검은색으로 예쁘게 색을 칠한 지붕으로 마무리. 서울 같으면 시도해 보기도 어려울 정도의 과감한 조합이지만 그게 제주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고, 또 매우 조화롭기 때문.
이번 제주 여행에서 머물렀던 곳은 하도리, 그 동네의 작은 구옥을 예쁘게 고친 "팔월의 라". 아침이 되어 창을 열면 온 집안에 따스한 햇빛이 한가득 들이치고, 창밖으로는 예쁜 담장과, 하늘과, 초록만이 보이는 곳. 화려한 치장이나 값비싼 어메니티 대신 작은 라디오와 책, 소담한 이부자리가 있는 공간.
제주 여행에서 그 섬의 바람과, 햇빛과, 초록, 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는 마음의 고요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크게 만족할 만한 숙소다. "팔월의 라" 덕분에 제주가 지금보다도 더 좋아질 예정.
"팔월의 라"라는 이름은 김연수 작가의 단편 소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서, 그리고 주인장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함석지붕 위에 떨어지던 빗소리를, 그리고 어쩌면 뻔할 수도 있는 사랑 이야기를 아주 아름답게 담아낸 소설이니 일독(一讀)을 추천. 더하여, "팔월의 라"에서는 유독 작은 코끼리 조각품들도 눈에 띄는데 어쩌면 이건 같은 작가의 다른 소설인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에서 모티브를 따온 게 아닐까? 역시 아주 재미있는 단편 소설이기에 이 작품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