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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하당 Mar 30. 2022

최대회복상태에 이른다는 건

무서록

새 악보를 펼치고 악보를 읽을 때, 손가락 번호를 하나씩 써넣을 때, 끝없는 반복으로 근육에 곡을 새겨 넣을 때, 그리고 이 모든 단계를 지나 드디어 음악을 만들어 나갈 때. 한 곡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이 모든 단계는 분명한 고비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 중 “이 곡은 어디쯤에서 멈출까”라는 이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새로운 곡과 좋은 연주에 대한 끝없는 욕심, 그리고 생업에 치이느라 부족하기만 한 시간과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실력 사이에서 내가 내린 선택은, 한 곡을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그러니까 의학으로 치면 "최대회복상태(Maximum Medical Improvement, MMI)*"에 다다를 때까지 연마하는 것이다. 전문 연주자만큼의 결과를 낼 수 없음을 이미 잘 알고 있다고 해도, 마음속에서 여러 합의를 거쳐 이 MMI 포인트를 찾아낸다는 것은 꽤나 슬픈 일인 게 당연하다. 하지만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매우 사치스러운 고민인 것 역시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하면 이런 과정 역시 하나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정하고 나면, 어설프게나마 손끝에 아름다운 곡을 잔뜩 담아보면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포기해야 한다(삶이 500년씩 지속된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물론 몇 가지 연주를 집중적으로 비교 감상한다거나 악보를 구석구석 살펴보면서 얻는 게 생기기는 하지만. 그런데 내게 있어 가장 큰 만족감은 의외로 음악 외적인 것에서 온다. 뭔가를 끝낸다는 느낌이 바로 그것이다.

3년 정도 열정적으로 도미(渡美) 준비를 하던 중 멈춘 전력이 있는 나. 척척석사에서 길어지기를 그만둬 버린 가방끈(좀 더 구질구질하게 써 보자면 박사 "수료"라고 해야겠지만). 원하던 세부 전공과는 영 거리가 있는 지금. 이런 경험이 내게는 모두 중도 하차의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내키는 대로 어디선가 내린 게 아닌 반쯤은 강제로 하차를 당해버린 느낌이라서인지 마음 한구석에 나도 모르는 멍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언제인가부터는 끝을 보기로 마음을 먹은 게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끝을 내고 싶어 하고, 끝을 낼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은 시작하는 것조차 무서워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바흐의 2성 인벤션은 총 열다섯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곡을 연주해 보겠다는 당찬 포부로 시작했던 게 언제인지 이제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느덧 열두 곡을 지나 고작 세 곡만을 남겨둔 상태. 하지만 그중 두 곡은 영 취향에 맞지 않고, 한 곡은 기교적으로 좀 부담스러운 관계로 막판에 큰 고비를 맞이하고 있다. '열다섯 곡 중 열두 곡이나 했으면 된 거지', '80% 면 충분하지 꼭 다 해야 할까'와 같은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스무 번씩 마음속에 자리 잡지만, 더 이상 나의 중도 하차 목록에 뭔가를 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런 생각은 꾹꾹 눌러놓은 채 완주를 해낼 작정이다.


아무리 짧은 거리라고 해도, 그리고 심지어 마지막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고 해도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에게는 "Finisher(완주자)"라는 단어가 새겨진 메달이 주어진다. 아픈 다리와 벅찬 폐를 끌고 결승점을 지나 받아 든 그 요상한 색깔의 메달은 내게 있어서는 부족함이 조금도 없는 메달이었다. 걸으며 뛰며 열심히 달려온 나의 인벤션 마라톤의 결승점이 어느덧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몇 걸음도 부디 힘내서 "Finisher"라는, 그 무엇보다 멋진 단어가 새겨진 메달을 받아 들어야지.


*최대회복상태: 더 이상 치료를 지속해 봐야 딱히 더 나아질 게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건강하던 상태로의 완벽한 회귀를 원하는 환자의 입장에서야 참 매정한 소리지만, 아직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까. 물론, 언젠가는 이 단어가 과거의 어느 때보다 더 나은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면 참 좋겠다.


제주 세화공작소(2022), Olympus OM-1/Yama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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