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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하당 May 16. 2022

집 이름에 대한 소고(小考)

무서록

잉글랜드의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과 한국의 경복궁(景福宮). 서양에서는 대체로 지역이나 주인의 이름을 따라,  한국에서는 특정한 의미를 담아 건물과 공간을 명명해 왔다.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쯤 되면  건물이나 공간에 이름을 붙여주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한 유구한 전통이 아닐까.  


그 연장선 상에서 오늘날 한국의 아파트 역시 다양한 이름을 달고 있다.  


1. 개발의 시대

서울로  인구가 몰리기 시작하던 시대에는 아파트가 위치한 지역과, 건설사의 명칭을 조합해 집의 이름을 지었다. 강남의 논밭을 갈아엎어  아파트를 지어 올림으로써 부족한 주택을 확보하고, 주거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자 했던 시대의 아파트들이 대체로 이런 식으로  지어진 이름을 달고 있다.    

예) 압구정 현대 아파트, 잠실 주공 아파트 


2. 1기 신도시

서울의 과밀을 해소하고, 보다 넓은 면적의 계획된 도시를 만들어 나아가던 1기 신도시(분당-일산-중동-평촌-산본)에서는 단지마다 00마을이나 00촌, 00타운이라는 접두어를 붙여 구획을 나눴다.  

예) (분당) 장미마을 현대 아파트, (중동) 보람마을 아주 아파트


3. 브랜드의 시대  

언제인가부터 건설사들은 아파트에 사명 대신(또는 사명과 함께) 별도의 브랜드명을 넣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예가 삼성물산의 래미안, GS 건설의 자이, 대우건설의 푸르지오, 현대건설의 힐스테이트 등이다. 이때부터 아파트는 지역과 브랜드의 유무로 나뉘게 되며, 실제 공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결과물이 어떤지와는 별개로 '명품' 아파트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예) 서초 삼성 래미안 아파트, 죽전 힐스테이트 아파트


4. 환경의 시대

  주거 환경이 어느 정도 상향 평준화된 이후에는 가까운 거리에 공원이 있는지, 한강이 가까운지, 단지에 학교를 품고 있는지 등  주변 환경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등장한 개념이 펫 네임(pet name)인데,  이 이름에 따라 청약 성적이  달라진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니(물론 실제로는 입지 환경으로 인해 좌우되었으리라 본다) 심사숙고해서 작명할 법도 하다. 단지에  학교를 품고 있거나 교육 환경이 좋으면 에듀(Education),  주변에 숲이 있으면 포레(Forest), 그리고 한강이 보인다거나 가까우면 리버(River)가 따라붙는 식이다.  

예) (흑석) 롯데캐슬 에듀 포레 아파트, 이촌 삼성 리버 스위트 아파트, e편한세상 옥수 파크 힐스 아파트


5. 가치의 시대

이제는  브랜드와 주변 환경을 넘어 이제는  거주하는 사람의 가치(?)를 대변할 수 있는, 그들의 희망을 투영할 수 있는 이름이 대두되고  있다.  짧은 단어로 핵심적인 가치를 나타내야 하는 만큼 신조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지역명이 자랑거리가 될만한 경우(부동산 가격이 비싼 동네라면) 대체로 지역명이 함께 따라붙는다.   

예) 래미안 서초 에스티지(S-Seocho, super, smart, special+Prestige) 아파트, 개포 프레지던스(President+Residence+Confidence) 자이 아파트


 수많은  창문 중 어떤 게 내 집인지 알기 어려운 공동 주택의 특성상, 외관 특화(입면 특화)에 더해 공간의 개인화를 위해 이런 식의  작명이 이어지는 것일 수도 있겠고,   청약 성적이나 이후 집값의 추이와 같은 현실적인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면,    최고가 되고 싶다는 바람의 순수한 표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직설의 시대임을 감안하더라도, 과연 이런 식의  작명법을 통해 탄생한 이름이 개인의 개성이나  삶의 지향점을 담아낼 수 있을까.


집은  평생의 기억을 담아내는 그릇이고, 사는 이의 취향과 삶의 방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공간이다. 이제는 건설사의 유명세나 브랜드  대신, 또한 동네의 부동산 가격이나 계층 의식을 담은  신조어 대신 나의 지향점을  더욱  잘 담아낼 수 있는 이름이 무엇 일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한다. 충분히 그럴 때가 되었다.


서초현대아파트(2020), Rolleicord Ia/Fomapan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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