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일요일 아침 손바닥 위에 놓인 100원 속 비친 내 얼굴은 동전만큼이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동전의 숫자만큼이나 오래된 모태 신앙이었다.
할머니부터 대를 이어 천주교를 믿어오고 있었다. 그런 나는 매주 일요일 아침 8시에 아버지에 의해 강제 기상 이후 세수를 하고 약 5km가량 떨어진 구포성당 주일학교에 동생들과 꾸역꾸역 다녔다. 100원은 그런 주님을 위한 헌금인셈이다.
어린 나에게 유일하게 늦잠을 잘 수 있는 일요일 아침마다 깨운 아버지가 미웠고, 늦잠을 자고 나와 놀이터에서 마음껏 놀고 있는 또래 친구들을 보면서 또 한 번 더 할머니를 미워했다. 그런 나는 나의 아이들이 태어나면 성당을 다닐지 말지, 하느님을 믿을지 말지는 "네가 알아서 선택해"라며 쿨함을 보여주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어느새 세월은 흘러 병실 한편에서 마주한 할머니의 모습. 막내 고모는 돌아가시기 두 달 전, 할머니가 처음 성당을 다니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머니는 시집을 와서 마음고생이 심하셨다고 한다. 시집와서 딸만 3명을 내리 낳았던 할머니, 술을 좋아하는 할아버지... 그런 집안일이며 농사일,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 등, 그런 할머니를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밖에서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오는 할아버지... 모든 게 뒤틀려져 있었다. 그런 할머니를 더욱더 속상하게 한 것은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할아버지가 밖으로 도는 것이라며, 딸만 3명 낳은 것 또한 그러한 증거라며 시어머니가 괴롭혔다. 그 당시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뒷마당 장독에 정화수를 떠 놓고 그저 비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아니면 마을 어귀 성황당으로 가서 제발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가지게 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며 간절히 빌었다고 한다.
그렇게 딸만 3명인 집안에 귀한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가 6살 때 사라지셨다. 만약 아버지가 죽거나 납치라도 당한다면 그 비난의 몫은 또 할머니에게 돌아갈 것이 불 보듯 뻔하였다. 그런 할머니는 딸들과 함께 옆 동네, 앞 동네, 동네 어귀 등 수소문해 가면서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는 할머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을 성당 안 놀이터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고 한다. 그걸 지켜보던 성당의 수녀님은 그런 아버지를 안쓰럽게 여겨 성당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간식도 주고 추위도 녹이며 머물게 하셨다. 6~7시간을 헤매다 찾은 아들을 보고는 "어디 귀신씨 나락 까먹는 귀신 나부랭이가 남의 귀한 아들을 데리고 있노?" 하며 성을 냈지만, 나중에 수녀님이 아들에게 했던 호의에 감사를 느끼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믿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내가 가지고 있던 교회에 대한 의구심은 다소 해소되었다.
'슬픔의 방문' P145쪽에서 장일호 작가는 "할머니는 왜 교회에 다니세요?" 할머니가 지긋이 웃었다. "교회에서는 내가 평생 들어보지 못했던 예쁜 말만 해 줘."라는 본문을 읽고 나 또한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린 시절 아침 일찍 일어나서 주일학교에 가서 주기도문을 외우고, 하나님을 위해 노래하며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갈까?라는 의문이 계속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교회 사람들의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그들의 교리에 대한 옳고 그름. 내가 생각하는 기준과 잣대만 가져다 들이대려 한 것이 아닌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믿음이 무엇이고 구원이 무엇인지, 나에게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과연 내가 믿는 것이 맞는 것인지 등을 계속 되뇌며 복기했다. 어쩌면 "교회에서는 예쁜 말만 해줘"라는 격려의 말과, 할머니가 그 당시 타인에게 느꼈던 작은 호의 하나가 성당으로 이끌지 않았을까?